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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현 Aug 04. 2021

내가 여행을 사랑하는 이유

아르코미술관 <정재철: 사랑과 평화>

당신은 무엇을 사랑하나요? 저는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나의 하루를 다시금 들여다보는 것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나만의 언어로, 나의 냄새가 물씬 풍기도록 표현하는 것을 사랑합니다. 새로운 것을 보며 같은 감정을 느끼고, 익숙한 것을 보며 새로운 감정을 느껴요. 제게 낯선 것들을 매일 함께 하는 사람과 즐길 때의 감정을, 새로운 사람과 내게 익숙한 것들을 즐길 때의 감정을 사랑해요. 그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활자에 새겨 넣고자 하는 욕망이 강합니다. 저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글을 쓰는 것을 사랑하지만, 그것은 어쩌다 보니 나의 강박적 행위가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수련회 때였다. 하루 동안 느낀 것들이 그렇게나 많았는지, 소등 후 깜깜한 숙소에서 수첩도 아니고 관광지 소개 브로셔에 내가 느낀 모든 것들을 검은 모나미 볼펜으로 휘갈겨 썼다. 다음 날 아침, 뭐라고 썼는지도 모르는 글자들이 이리저리 겹쳐있었다. 그게 내 강박의 시작이었다. 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잊지 않겠다는 욕망이 뒤섞인 강박.




사랑하는 것의 강박적 행위



혜화에 위치한 아르코 미술관에서는 현재 작가 정재철(1959-2020)의 작고 1주기전으로 작가의 작업세계를 조망하는 기획초대전 <정재철: 사랑과 평화>가 진행 중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가 장소를 이동하며 수행했던 참여 형식의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통해 그가 지향한 예술적 실천에 한 걸음 다가가고자 한다. 전시는 총 두 전시실로 나뉘어 있으며, 각 공간은 공통의 목적성을 지니며 각자의 분위기를 뿜어낸다.


정재철의 작가 노트 일부에는 ※놀이: 놀고 있다고 하기엔 그 놀이조차 수단으로 쓸 만큼 나는 확실한 작가이므로 그것은 제외될 수밖에 없다.라고 적혀있다. 그의 작업물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가 얼마나 매 순간순간을 자신의 작업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실크로드 프로젝트>


제1전시실에서는 정재철의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사진, 영상, 루트맵, 여행일지 등으로 재맥락화한다. 이번 전시에서 그의 기록과 수집된 결과물 하나하나는 나의 가슴을 여러모로 쿵쿵 쳤다.


#1

정재철에게 보낸 편지와 우편엽서, 1990년대 후반 - 2000년대 초


제1전시실 입구는 지인들이 그에게 보낸 편지와 엽서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사람의 편지를 몰래 읽는 것만큼 은밀한 일이 있을까? 한동안 편지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편지 속에는 왜 이렇게 연락이 되지 않느냐는 푸념과, 브루클린에 방문하자마자 너의 작품을 보러 소크라테스 조각공원에 다녀왔다는 소식, 함께 담배 피우며 마시던 소다가 그립다는 추억팔이, 러시아에서 작업을 하기 위해 있다는 소식과 더불어 네가 올해 모리셔스로 작업을 하러 왔으면 좋겠다는 애정 섞인 끝맺음말 등이 녹아있다.


어렸을 적 친구들 사이에 유행했던 100문답 같은 것들이 쓸 때면 꼭 이런 게 하나씩 있었다. "내 보물 1호는?"과 같은 질문 말이다. 나를 비롯한 친구들 몇 명의 대답을 차지했던 건 "편지 상자"였다. 지금은 뜸해졌지만 내가 초등학생, 중학생일 때까지만 해도 손편지가 유행이었고, 심지어 교환일기도 썼더랬다. 예쁜 편지지부터 조그마한 노트, 심지어 이면지에까지 오늘 급식에 탕수육이 나온다더라, 아직 2교시 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기다리냐는 의미 없는 말들을 편지라는 말로 포장해 전하곤 했다. 그런 낭만이 있었다. 과거의 낭만적인 일들을 되새기는 일은 여전히 내 가슴이 쿵쿵 뛰게 한다.


#2

정재철, <실크로드 프르젝트 안내문 : 영어, 힌두어, 펀잡어, 네팔어, 중국어, 위구루어, 우루두어>, 2004-2005, 종이에 프린트, 인장, 각 37x25cm


정재철은 자신이 기획한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각 언어로 된 안내문을 만들었다. 이 언어들에는 영어, 힌두어, 펀잡어, 네팔어, 중국어, 위구루어, 우루두어가 해당한다.


정채철, <1차 실크로드 프로젝트 - 루트맵 드로잉 1>, 2006(2018년에 병품으로 제작), 장지에 연필, 채색, 248x483cm


이는 정재철의 <1차 실크로드 프로젝트 - 루트맵 드로잉 1>(2006)으로, 그가 실크로드 프로젝트로 방문한 경로를 다수의 루트맵 드로잉으로 남긴 것이다. 이 루트맵 드로잉 속에는 1차 여정의 종료 이후 경로와 지역을 기록하고, 2차, 3차의 계획이 담겨있다. 다음 여정의 예견된 장소와 시간의 기록이 그려진 루트맵에는 이미 종료한 이 프로젝트에 시간성을 기입하고 과거의 정재철이 향했던 내일을 마주치게 한다.


정채철, <1차 실크로드 프로젝트 - 루트맵 드로잉 1>, 2006(2018년에 병품으로 제작), 장지에 연필, 채색, 248x483cm


실크로드 프로젝트에 해당하는 여러 기록과 수집들 중, 내 가슴을 가장 쿵쿵 뛰도록 한 것은 바로 작가의 삶과 가치관 그 자체였던 여행일지이다.


아래는 그의 여행일지 일부이다.

정재철, 실크로드 프로젝트 기간 동안 작성한 작가노트, 2004, 2005, 2008, 2010


하루 동안 일어났던 일을 일기로 쓰기도 하고, 생활에 필요한 그 나라 언어를 메모해 두기도 하고,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영감 삼아 머리를 떠다니는 생각들에 기반을 둔 창작을 하기도 한다. 정재철은 국가의 경계를 넘으며, 길 위에서 폐현수막을 나누어주고 뜨거운 태양 아래 그늘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연한 만남, 교류, 사건과 상황을 만들고 기록하였다. 정재철에게 여행이라는 이동과 길 떠남은 곧 삶의 방식과 예술적 실천이었다.


10년째 꾸준히 일기를 쓰고 있는 나로서 정재철의 여행일지는 적잖은 동질감으로 시작해 향수로 이어졌다. 내가 살면서 가장 열렬히 썼던 때는 아무래도 2019년 8월 16일부터 5개월 하고도 하루가 더 되는 그 기간 동안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동안 총 세 권의 일기장을 가득 채웠다. 첫 번째 일기장은 더블린으로 유학을 다녀온 친구가 갤러리에서 내가 떠올랐다며 사다 준 '글을 쓰는 여자가 그려진 짙은 바다색 노트'였고, 두 번째 일기장은 프랑스 릴의 플라잉타이거에서 구매한 '3유로 정도의 아이보리색 노트', 세 번째 일기장은 귀국 무렵 빠리에서 구매한 '이봉 랑베르의 하얀색 하드커버 노트'였다. 나는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여행을 사랑하는 이유는 끊임없이 꿈을 꾸며 그 꿈을 "마음껏" 글로 쓰고, 사진으로 찍고, 그림으로 그리고, 노래로 부르며, 춤으로 출 수 있기 때문이었다.


#3

<실크로드 프로젝트>에서 드러나는 이동, 이주의 움직임은 작가노트에 하나씩 지워간 달력, 과거로부터 온 편지와 우편엽서, 그리고 정재철의 기록의 파편을 이어 붙이는 백종관의 영상으로 이어진다.


정재철, <3차 실크로드 프로젝트>, 2010,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3분 43초


1차 실크로드 프로젝트(실크로드 프로젝트) 영상은 세탁, 포장, 전달, 재방문을 통한 기록의 과정, 2차 실크로드 프로젝트(뉴 실크로드 프로젝트) 영상은 현지인들과 공동 제작하고 그늘을 만드는 과정, 3차 실크로드 프로젝트 영상은 현지 수공예 장인들의 참여로 점차 자라나는 실크로드 프로젝트 과정을 담고 있다.


정재철, <3차 실크로드 프로젝트>, 2010,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3분 43초


전시의 제목인 '사랑과 평화'는 <실크로드 프로젝트>의 마지막 여행지였던 영국 런던의 팔리아먼트 광장 (Parliament Square) 반전시위캠프의 천막 위에 적은 문구다. 작가의 작업에서 빈번하게 발견되는 사랑, 그리고 평화는 사회 참여적 프로젝트를 통해 지향했던 공동의 지평을 드러낸다.


이는 곧 제2전시실과 이어지며,  결국 이 전시는 수행하는 몸으로 경계 이동을 실천했던 작가의 태도와 공유지에 대한 문제의식에 기반하여 순환하는 사물에 드러나는 그의 생태에 대한 사유를 좇는다.


<블루오션 프로젝트>


제2전시실은 '사물의 물질성에서 발굴한 순환적 가치와 생기'라는 작가의 태도를 보여준다. 정재철이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조각에 대한 조형적 관심과 동시에 사물 자체에 내재한 힘과 생기에 대한 인식, 나아가 생태에 대한 사유를 엿볼 수 있다.


정재철, <블루오션 프로젝트 - 크라켄 부분>, 2021년 재설치, 혼합재료, 가변크기


(좌) 정재철, <제주일화도>, 2019, 장지에 채색, 150x210cm (우) 정채철, <북해남도 해류전도>, 2016, 장지에 채색, 210x150cm




오래된 꿈


예전에 친구랑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C: 교양 수업으로 철학을 듣는데 오래된 꿈에 대해서 배웠다?

    K: 오래된 꿈?

    C: 응. 근데 오래된 꿈이라는 단어 참 모순적이지 않어? 꿈은 계속해서 꾸는 건데 오래된 꿈이라니.

    K: 그러게... 근데 또 가슴 한켠에 있는 어렸을 적 막연히 꾸던 순수한 꿈 하나쯤은 가지고 사니까.


나는 꿈이 많고, 오래된 꿈들도 많다.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고, 그것에 대한 브레인스토밍을 비롯한 상상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넘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김주현이라는 사람을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이를 이루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도 고안하던 그런 때가 있었다. 이번 전시를 통해 구석에 숨겨둔 나의 오랜 꿈을 꺼내어 볼 수 있었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자신이 의도한 작업물들을 설치하기 위해 직접 발로 뛰며 현지인들과 소통하고, 구현을 위해 시뮬레이션하고, 실제로 설치해서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는 것까지의 나에게 정재철 작가의 모든 과정은 나의 오래된 꿈을 실현하고 있는 행동가로서 보였다.


나는 예술가를 존경한다. 예술가를 비롯한 모든 표현하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머릿속의 '무엇'들을 끝끝내 가시화해내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글, 그림, 음악, 사진, 패션, 영화, 건축, 미술, 조각 등의 창조자들을 존경한다. 창조자(creator)는 곧 행동가(doer)이고, 행동가는 곧 사상가(thinker)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를 마음껏 글 쓰고, 사진 찍고, 그림 그리고, 노래 부르고, 춤추며 꿈을 꾸게 하는 여행을 사랑한다. 여행은 나로 하여금 가슴 한켠의 오래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무대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오래된 꿈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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