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주현 Sep 14. 2021

경계들의 맞물림

<레몬은 파란색 그림자를 갖고> WESS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그 시간의 경계 속에 살고 싶다. 그 경계의 시간 속에서는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고, 해도 된다는 면죄부를 얻는 그런 기분이다.




아무것도 위임되지 않은 시간



이번 WESS 전시 <레몬은 파란색 그림자를 갖고>의 큐레이터 김선옥은 정확하게 낮도 밤도 아닌, 해가 질 때쯤 애매모호한 시간을 일컫는 '개와 늑대의 시간'(L'heure entre chien et loup)을 전시의 주제로 삼는다. 그리고 이 시간을 '아무것도 위임되지 않은 시간'이라 일컫는다. 13세기 고대 로마부터 쓰였던 관용어인 개와 늑대의 시간은 빛과 어둠이 겹쳐 생긴 어스름한 실루엣의 그림자 때문에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이 안 되는 기존의 시공간이 전복되는 경계를 설명한다. <레몬은 파란색 그림자를 갖고>는 전시에서 사물들의 기존 질서가 어긋나는 균열의 순간에, 역설적으로 의미가 다시 생산되는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모순적 시간 속 다의적 존재


좌측부터 순서대로 김보민  <변신>, <하울링>, <포옹> 


김보민의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수동적으로 경계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됨이다. 모든 사물은 전시장에 위치하는 순간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로 작동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가장 가시화하여 나타낸 작품들은 바로 아래와 같다. 기획자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다. 작품의 목격자들은 예측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사물을 해석하고, 더 나아가 이것의 의미화를 위한 각자의 방식을 시도한다. 사물과 거리를 좁히고 눈을 마주치며, 시선을 통해 사물을 더듬고 감각하기를 시작한다. 이 과정으로부터 지각된 경험에서 비로소 우리는 사물을 이해하고, 의미를 해석할 수 있게 된다.


김보민, <변신>, 모시에 수묵담채, 130.3x162.2cm


<변신>(2020)은 <그림자>(2016)의 연작으로, <그림자>와는 달리 입체적인 서사를 드러낸다. <그림자>는 분할된 경계 속 사물들이 자신의 그림자로 다른 사물이 되거나 다음 장면으로 연결되며 연속적인 움직임으로 같은 시잔에 공존하는 데에 반해,  <변신>은 시차를 두고 배경이 달라지고, 서사가 더해지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 김보민은 <변신>에서 개화산 약산사의 동굴 설화를 모티프로 북촌의 골목 풍경을 그려 넣으며 역사적 장소와 현재 실존하는 장소를 한 화면에 담아내며 누적된 시간을 드러낸다. 이는 풍경화의 기록적 속성을 거부함과 동시에 작가의 적극적 개입으로 재구성된 설화가 액자 구조처럼 다양한 이야기가 중첩되는 입체적인 서사가 되었다.


김보민, <포옹>, 2018, 비단에 먹과 호분, 각 31.8x40.9cm (5 pieces)


<포옹>에서의 연쇄적 움직임은 비단 위에  먹과 호분의 질감으로 입체적 몸짓이 되며, 이는 빛에 의해 생기는 프레임 밖의 그림자로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게끔 새로운 공간을 제공한다. 


김보민, <하울링>, 2021, 비단에 수묵채색, 가변크기 (3 pieces)


작가는 전통회화만의 정형화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이는 전통과의 단절이 아니라 서구화된 양식 속 시간의 횡축을 자유롭게 조절하여 전통의 시간성을 재정립하고, 현재에서 과거를 감각하도록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김보민의 그림은 동양/서양, 전통/현대, 자연/도시, 꿈/현실, 허구/실재 등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거나 단절할 수 없는 조화로운 세계를 드러낸다.


장보윤, Black Veil1, 2021, Single Channel Video, 6min 24sec, Variavle Size


장보윤의 <블랙 베일>은 개인이 기억하는 파독 간호사의 삶을 다룬다. 이번 영상 작업 역시 장보윤이 영상 작업에서 자주 사용하는 '실제 당사자가 아닌 낯선 타인의 입을 빌려 전달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통해 작가는 관습적으로 대상을 지각하는 시간을 유예시킨다. 


장보윤, Black Veil2, 2021, Single Channel Video, 12min 43sec, Variavle Size


이 작업물은 독일 출신 배우의 신체를 통해 드라마틱하게 한국 여성의 편지를 낭독하면서, 대상의 리얼리티를 증언한다. 이는 기존의 관성적인 다큐멘터리 속성을 거부함이다. 나아가 <블랙 베일>의 독백에서 비연속적으로 뒤섞인 문장들은 개연성을 벗어나 기존의 서사를 재구성한다. 결국 재현된 이미지를 통해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사이에서 휘발된 실제 이야기는 작가가 선택하고 편집한 몽타주로 재구성되고, 이로써 기록은 비로소 운동성을 획득함이다.


장보윤, Black Veil1, 2021, Single Channel Video, 6min 24sec, Variavle Size


파독 간호사의 삶과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소설 <목사의 검은 베일>(1936)이 녹아 있는 장보윤의 <블랙 베일>은 작가가 개인의 삶을 추적하여 떠나는 여정으로, 절대 과장하거나 정도가 지나친 법이 없다. 그곳에는 환락은 없지만 낯설게 보이는 익숙한 풍경이 있다.


장보윤, Hamburg1, Hamburg2, 2021, Digital Pigment Print, 40x60cm




경계들의 맞물림


이창동 <버닝>


이창동 감독의 <버닝>은 경계들의 맞물림 그 자체이다. 이를 가장 단편적으로 잘 보여주는 장면은 낮과 밤의 시간의 경계 속 불완전한 개개인, 흘러나오는 Miles Davis의 Generique에 맞추어 춤을 추는 해미가 담긴 씬이라 생각한다. 씬에 담긴 모든 것들이 경계에 서있었고, 불완전했다. 그럼으로써 완전한 하나의 씬을 완성한다.


끝과 끝이 맞닿는 것은 어떻게 보면 가장 불완전한 것들이 맞닿는다고 할 수 있다. 색을 품은 빛의 가장 끝자락이 맞물린다, 계절의 끝자락이 맞물린다, 낮의 끝자락이 맞물린다. '맞물리다'는 '맞물다'의 피동사로서, '끊어지지 아니하고 잇닿게 되다.'라는 뜻을 지닌다. 결국 맞물린 끝자락은 시발점이 된다. 새로운 색의 시발점, 새로운 계절의 시발점, 새로운 시간의 시발점.


이러한 측면에서 맞물린다는 표현은 꽤나 매력적이다. 노을이 황혼의 시간을 통해 낮과 밤을 연결하듯, 어떠한 것의 끝자락이 맞물릴 때의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사람들이 왜 노을이 지는 시간을 사랑하겠는가. 맞물림은 또 다른 시작이다. 균열은 경계이고 틈이며, 역설이고 그로 인한 움직임이다. 그렇게 우리는 다의적 존재가 된다. 

작가의 이전글 내가 여행을 사랑하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