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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름 Nov 10. 2023

게으른 완벽주의자의 최후

그래도 해냈다.

  “그까짓 것 대충” 써보겠다는 글은 도무지 써지지가 않는다. 이 정도면 글쓰기 공포증이라고 해야 할까.


  새로 산 새하얀 글쓰기용 아이패드는 첫 번째 글을 발행한 후 오늘 처음 잠금 해제되었다. 엉덩이만큼이나 무거운 손가락은 도무지 움직이질 않는다. 내 그럴 줄 알았다. 학창 시절 시험은 늘 벼락치기로 밤을 새워서 공부했고 대학시절 리포트는 매번 마지막날 세이프로 간신히 제출한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딱 예상대로 그렇게 수일이 지나갔다. 삶이 가시방석이었다. 행동만 하지 않았지 머릿속으로 수백 번 아이패드를 열어 브런치를 접속했고 수십 번 글을 쓰고 또 썼다. 허상의 자아가 n차원의 세계에서 글을 쓰고 있던 그때 잠자고 있던 초자아가 고개를 불쑥 들어 다시 예전처럼 채찍질을 해댔다.


‘내가 너 그럴 줄 알았지. 또 시작만 하고 끝은 못 보는 거지.’

‘넌 왜 그렇게 글쓰는 재주가 없냐? 남들은 매일 글 써서 발행을 쭉쭉하는데 재주도 없는데 뭘 그렇게 하겠다고..ㅉㅉㅉ‘

‘넌 그냥 그 자리에 안주할 수밖에 없는 거야. 너에게 성공이란 없어.‘


  부모에게 물려받은 초자아를 5년간 1500만 원(혹은 그 이상) 시간과 돈을 쏟아부어 심리상담을 받으며 가까스로 잠재워놓았는데 이 놈의 ‘글쓰기’가 잠자고 있던 초자아의 코털을 건드린 것이다. 만신창이가 되었다. 지금 이 순간, 이 상황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삭제했던 인스타그램을 다시 다운받아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남의 인생을 훔쳐보며 시간을 보냈고(부러워했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나를 근사하게 포장하고 싶었는지 옷 쇼핑으로 텅 빈 마음을 채워나갔다. 그렇게 자꾸 글쓰기를 회피했다.


  후회도 했다. 괜히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해서 이렇게 글쓰기 시작도 못해버리는 못난이가 되어버리다니. 차라리 그냥 ‘읽는 사람‘으로만 남을걸. 그래도 꾸준히 독서를 하는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글을 써야 하는데 글쓰기는 시작도 못하고 그렇다고 다른 일에 집중을 할 수도 없고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 이번주 글쓰기는 포기하고 그냥 놀아야겠다 마음먹었다. 마음을 내려놓으니 겨우 책을 손에 집어들 수 있었는데 글쓰기의 시작도 못하고 있는 이유를 책에서 찾았다.

  로고 테라피의 창시자 빅터 프랭클이 말하길 꼭 하고 싶다는 강한 의욕이 그 일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을 과잉 의도라고 한다. 글을 잘 쓰고 싶고 작가가 되고 싶다는 나의 강한 의욕이 글쓰기의 시작조차 못하게 만든 것이다. 그는 이러한 과잉 의도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를 ‘역설 의도’ 기법으로 고치거나 완화시킬 수가 있다고 하는데 이번주 글쓰기를 포기하고 놀겠다고 선언한 것이 역설 의도가 되어 지금 이렇게 아이패드 앞에 앉아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180~189p. 참조)




<브런치 프로젝트> 2기 4주 차 과제 마감 3시간 전이다. 난 이렇게 글을 쓰고 있고 오늘도 세이프로 아슬아슬하지만 무사히 과제 제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거면 되었다. 그래도 해냈다.


p.s. 글을 잘 쓰고 싶고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은 버리기로 했다.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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