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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름 Jan 03. 2024

대체 왜 쓰고자 하는가

지극히 개인적인 ‘쓰기 욕구’에 대한 고찰


 빅터 프랭클의 역설 의도가 효과가 있었나. (이전 글 참고)​  


 글을 잘 쓰고 싶고 작가가 되겠다는, 마음속 묵직이 자리 잡은 맷돌을 하나 드러내니 손가락이 피아노 치듯 가볍게 움직인다. 언제 내가 이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쓰고 또 쓰고 있다. (발행은 못하고 있지만) 벌써 저장한 글이 3개나 되고 핸드폰 메모장은 쓰고 싶은 소재나 순간의 짧은 글들로 빼곡하다. 매우 고무적이다. 최근 새로운 습관이 생겼는데 머릿속으로 계속 쓴다는 것이다. ‘쓰다’의 정의를 찾아보면 붓, 펜, 연필과 같이 선을 그을 수 있는 도구로 종이 혹은 유사한 대상 따위에 일정한 글자의 모양이 이루어지게 하거나 글로 나타내는 것이라는데 요즘 나는 이마 뒤에 위치한 ’ 전전두엽에’라고 해야 할까 뇌 전체를 감싸고 있는 ‘대뇌피질에’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귀에 가까운 ‘측두엽에‘라고 해야 할까 머릿속 어느 부분에 검은 커서를 두고 무언가를 계속 쓰고 있다는 것이다. 샤워하면서, 설거지하면서, 길을 걸으면서도 누군가에게 책을 읽어주듯이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심지어 야무지게 퇴고도 하면서 말이다.


 이쯤 되니 스스로에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대체 왜 쓰고자 하는가, 언제부터 이렇게 쓰고 싶은 욕구가 생기었나. 쓰는 것을 이리 어려워하면서도 꾸역꾸역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계속 쓰고자 하는 것일까.




   2018년, 둘째가 태어나 돌쯤 되었고 첫째가 6살 때 일이다. 첫째 아이가 책을 읽거나 TV를 볼 때 음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도 깜빡깜빡거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이의 증상은 틱이었다. 대학교 때 아동발달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아이의 틱 증상은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라고 했다. 며칠이 지나니 아이는 말을 시작하기 전 입가 주변을 씰룩씰룩거리기까지 했다. 세 가지의 틱 증상을 보고 있자니 엄마인 내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틱이 하나도 아니고 세 가지나 되다니 아이가 저렇게 스트레스가 많았나. 모두 엄마인 내 잘못인 것만 같았다. 당장 아이를 데리고 근처 심리상담센터에 가서 종합검사를 받았다. 종합검사는 아이의 인지, 정서발달 검사(웩슬러 검사, 로샤 검사, HTP(집, 나무, 사람) 검사, 문장완성검사) 그리고 부모의 성격검사(MMPI2), 문장완성검사로 이루어졌는데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다.


  “아이는 별달리 큰 문제는 없어요. 그런데… 어머니의 우울지수가 위험할 정도로 높습니다. 이를 인지하는 것은 매우 낮고요. 방어도 굉장히 높고 스스로 억압을 많이 하시네요. 남들보다 기준이 높아서 그동안 힘들게 살아오셨겠어요. 어머니가…. “


  종합검사 결과를 차분하게 말해주던 상담사의 말을 끊어버리고 그럴 리가 없다, 남편과의 검사 결과가 바뀐 게 아니냐, 난 괜찮다 그다지 우울하지 않다며 한사코 손사래를 치는데 상담사의 한마디가 가슴에 탁 걸려 도무지 넘어갈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달라지지 않으면 아이가 계속 힘들게 될 거예요.
어머니가 힘들게 살아온 것처럼 그대로 자라게 됩니다.



  상담사의 이 한마디에 10회, 또 10회 때로는 자의로, 때로는 타의로, 때로는 등 떠밀려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한 지 5년, 200회가 넘었다. 심리상담을 받는 5년 동안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반증이라도 하듯이 나는 변화의 변화를 거듭해 갔다. 작은 알이 애벌레가 되고 애벌레가 커지면서 번데기가 되고 번데기가 탈피하여 나비로 성장하듯 사람도 이렇게 꽤나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겪으며 변화하는 모습들을 기록하고 싶었다. 그 누구도 나의 변화와 성장을 반박할 수 없도록 눈에 보이는 것으로 기록하고 증거를 남겨두고 싶었다. 시간과 돈과 노력을 들여 오랜 기간 어렵게 얻어낸 것들을 눈앞에 쫙 늘여놓고 하나하나 따져가며 스스로를 칭찬해 주고 인정해주고 싶었다. 아마 이 즈음부터 쓰고자 하는 욕구가 샘솟기 시작한 것 같다.

  샘솟는 욕구가 고여 우물이 되고 우물물이 넘쳐흐르게 된 것은 여러 변화들이 쌓이고 쌓여 내 안에 단단한 그 무언가 아마도 ’ 자아‘라는 것이 생겨났을 때였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에겐 ‘자아’라는 것이 없었다. (없었다기보다 흐렸다고 표현을 해야 할까.) 그저 엄마의 아바타로 살아왔기에 엄마의 마음이 곧 내 마음, 엄마의 생각이 곧 내 생각, 엄마가 지시하는 대로 잘 실행에 옮기는 삶을 살아왔다. 상담을 받으며 나의 상태를 인지 후 가장 먼저 이루어진 작업은 엄마로부터의 분리였다. 거의 한 몸처럼 살아온 엄마로부터 따로 떨어져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경계가 생기고 견고해졌으며 사춘기 때 만들어졌어야 할 자아가 마흔이 다 되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없었던 자아가 생기고 나니 <모여봐요 동물의 숲> 게임에서 무언가를 획득하면 손으로 들어 올려 “짜잔-”하고 보여주면서 자랑을 하는데 나도 새로(?) 획득한 내 자아를 짜잔- 하고 자랑하고 존재 자체를 표출하고 싶었다.

<모여봐요 동물의 숲> 무언갈 획득하면 이렇게 손을 들여올려 자랑을 한다. 짜잔- 효과음도 나오는데 게임이지만 뭔지 모를 성취감이 든다.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의 이윤주 작가는 시간과 불안을 이기기 위해 글을 쓴다고 하고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은유 작가는 삶이 왜 내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지, 이게 최선이고 전부인지에 대한 물음에서 글쓰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여러 작가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글을 쓰고 있듯 나는 그저 나 여기 있다고, 이런 사람도 있다고,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내 존재 자체를 알리고 인정받고 싶어 이리도 계속 쓰고자 했나 보다. 우주에 하나뿐인 ‘고유한 나’를 이 세상에 드러내고 알리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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