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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하 Mar 14. 2022

옛것이 주는 새로움

본래의 것을 초월하는 가치

 옛것이 주는 새로움이라는 말은 다소 역설적이다. 그럼에도 빈티지, 신복고(레트로), 퓨전 등 표현하는 단어는 많다. 단어 자체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전통이나 고전 등을 현대로 잡아끌어올 수 있다.

     

 작년 여름 매일 걷던 길을 걸었다. 작년 여름 다니던 학원 근처 골목길. 여러모로 그 학원이 썩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름이었다' 이 한 마디면 완성되는 하나의 서사처럼 여름이기에 기억이 일렁이며 예쁜 모양새가 되었나 보다.     






 부모님은 내 기억에 없는 어린 시절을 알고 있다.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하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현대문학 교수님들은 참 멋지다고 하시면서, '고아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빼앗긴 자'라는 비유를 들었던 경험을 말씀해주셨다. 유아기의 기억은 소실되기 마련인데, 그 기억은 부모님에게 다양한 형태로 남는다. 그리고 더 자란 뒤에 말이나 다른 것을 통해 본인도 알 수도 있겠다. 삶의 첫 부분이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다는 건 꽤나 아쉬운 일이다.


 며칠 전 엄마가 길에서 나를 기다리다가 나의 어릴 적을 생각했다고 하셨다. 나이트 음악이 둥둥거리고 퇴근길이라 자동차 라이트가 빨갛게 반짝거리는데 깨발랄했던 어린 내가 떠올랐다고 했다. 생각의 흐름은 알 수 없고 문득 떠오른 그 기억이 또 언제 가서 잊힐 지는 모르는 일이다.


 소셜미디어를 타고 다니다 유행노래 한 부분의 가사가 마음에 들어 왔다. '이 맘은 세상 단 한 장뿐이야' 폴라로이드 사진을 보조관념으로 삼아 사랑이라는 감정을 노래한다. 마치 스티커를 뗐다 붙였다 해서 끈끈한 자국이 남은 오래된 전자기기 같다. 기억은 빈티지하다. 옛 기억은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흐릿하다. 선명한 사진에는 없는 감성을 담고 있다. 내 기억에는 저절로 노란 필터와 노이즈가 끼는 걸까. 새것만의 맛은 날아가고 오랜 시간과 손때가 묻어 더 멋스러워진다. 빈티지의 어원은 포도주에서 왔다. 일정기간 숙성시켜 맛을 극대화하는 와인은 우리의 기억과도 같다. 좋지 않은 환경에서 숙성되었거나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면 우선순위에 따라 폐기된다. 기억이 휘발되는 것처럼.



 건망증이라는 게 왜 생기는지 알았다. 뇌의 용량이 가득 차면 뇌는 순위에 따라 기억을 삭제한다. 마치 용량이 가득찬 내 전자기기들처럼. 외장하드는 일기장이고 USB는 사진첩일까.





 얼마 ,   정독실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동그랗게 웃으시는 아주머니께서 내게 말을 거셨다. 말의 내용은 다소 일상적이었지만 소녀처럼 웃으시며 막내딸뻘인 내게 극존칭을 쓰셨다. 문득 고우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삶을 사셨는지 표정에서 보였다. 주름은 온통 웃는 얼굴 근육에만 생긴 듯한 느낌. 인간의 주름은 나무의 나이테와 비슷할까. 얼굴 주름을 보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있는  같다. 나는 어떤 증표가 생길까.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어르신과 인문학은 참 멋스러운 조합이다.





 옛것은 쌓이고 쌓여 새로운 가치를 만든다. 오래 읽히는 고전은 옛것이기 때문에 귀중한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적용되는 선조들의 지혜이기에 가치가 있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가치가 일부 수정되거나 덧붙여진다. 세계의 구동 원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의미는 신기하게도 옛말이 더 맞을 때도 있다. 문학도 그렇다. 그 시대를 고발하는 이야기는 지금도 공감이 된다. ‘와, 이 때도 이랬다고?’ 라는 생각이 들지만 곧이어 ‘몇백년이 지나도 해결은 되지 않네.’로 생각이 옮겨간다.


 우리가 고전문학을 여러 콘텐츠로 만들고 소비하는 이유는 뭘까.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정통 사극부터 시작해 드라마 속 작은 요소로 현대화되기까지 우리는 콘텐츠의 발달과 함께 옛것을 부활시켰다. 김수영의 시 <제니의 꿈>이 생각난다.

긴 것을 긴 것을 사랑할 줄이야
긴 것 중에 숨어있는 것을 사랑할 줄이야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긴 것 가운데
있을 줄이야






 강신주의 <철학vs철학> 서문을 보면 '철학'과 '철학함'을 구분한다. 칸트가 말했다. "철학을 배우지 말고, 철학함을 배우라." 둘은 생각의 주체에 그 차이가 있다. 다른 이의 이성이 써내려간 생각은 철학, 자기만의 이성으로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것은 철학함이다. 그리고 이 철학함의 동력은, 각각 동서양 철학을 대표하는 공자와 소크라테스의 공통된 주장인 '무지의 자각'이다. 내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면 배움에 제한이 생긴다. 나의 무지를 자각해야 비로소 우리는 '앎'을 얻을 수 있다. 옛것을 본래의 가치를 초월해 자기만의 이성으로 사유하는 것을 지향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나로부터의 사유'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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