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일 리가 없잖아
추석을 앞두고 요양병원에서 떠나신 외할머니. 개강한 대학생은 하나 남은 수업을 내팽개치고 집으로 향했다.
전화기 너머 엄마 목소리는 왜 공허함 속에서 떨리는지.
검은색 단정한 옷이 있던가, 근 3일 내 해결해야 하는 일은 없던가, 노트북을 챙겨야 할까. 생각하면서 버스로 40분을 달려 집에 도착했다. 동생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으니 동생은 한바탕 울음을 뱉어내고 난 목소리로 진짜냐고만 네 번을 물었다. 익숙하게 달랬다. 아직 어리기만 한 동생이다.
“거짓말일 리가 없잖아”
교무실에서 엉엉 울었다는 동생은 외할머니와의 교류가 없었을 텐데. 이럴 때마다 ‘막내는 막내군’이라는 생각이 든다. 평소엔 강한 이미지인데 가장 먼저 무너진다.
속이 빈 철이 더 강하다고 했다. 엄마는 단단했다. 속이 공허한 건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한편 이모는 웃으면서 이제 자기는 고아라고 했다. 나를 식겁하게 한다.
작년에 이어 맏상주는 큰이모부다. 딸만 여섯 명인데 상주 완장은 사위와 손자들만 찬다. 검은 줄이 두 개, 한 개, 그리고 희기만 한 완장. 책임감의 개수와도 같다.
영정 사진 속 외할머니 화질이 상당히 좋았다. 요새는 분향실에 인쇄된 영정 사진이 아니라 화면을 올리나 보다. 영상으로 얼굴 근육이 움직일 것만 같아서 계속 쳐다봤다.
작년에 보고 처음 보는 조카는 모험가처럼 등장했다. 배낭 안에는 못다 한 숙제와 장난감이 있었고, 가방 옆에는 돌돌 말린 종이가 두 장 꽂혀 있었다. 눈은 맑게 빛나고 얼굴은 발그레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작년에 이렇게 적었었다.
‘죽음은 언제부턴가 내 곁을 계속 떠나질 않는다’
그냥 내가 침울해서, 죽음이라는 단어에 울컥함을 느껴버려서 온갖 관련된 모양들이 평소보다 더 눈에 띈 게 아닐까. 왠지 모르게, 죽음이랄 것에 시선이 덜컥 걸려버린다.
초등학교에 갔다. 파트너 유학생은 중추절과 추석이라는 문화를 설명했고 아이들은 추석 때 할머니 할아버지를 뵙고 온 이야기를 했다. 몇몇은 조부모님이 자기 얼굴도 못 보고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죽었다는 어휘는 내 귀에만 당황스럽게 들린다.
“너 그러면 죽여버린다~”
헤에엑
아이들은 새로운 어른을 좋아한다. 새로운 사람을 보면 내가 가장 많은 교류를 해야겠어,라고 생각하는지, 맥락과는 크게 관계없는 이야기를 한다. 맥락을 거슬러 가기도 한다. 그들은 하고 있는 말이 검은지 푸른지 흰지 모르는 것 같다.
디즈니 캐릭터를 닮은 한 아이는 자기 동생이 죽었다고 했다. 아이의 눈이 텅 비어있을까 봐 눈을 볼 수가 없었다. 모니터 뒤에 숨었다.
어김없이 너덜너덜해졌다. 어른에게 일이 아닌 존재에 대해 혼난 것은 처음이었다. 잠도 포기하니 시야는 흐려지더라. 주변에 눈 돌릴 틈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고 나서 일이 끝나기도 전에 장례식장에 가야 했고 꿈 혹은 거짓말 같았다.
하지만 거짓말일 리가 없으니까.
검은 말들, 검은 활자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잊히질 않는다. 그분은 화를 풀었고 나는 붕대를 그제야 풀었다. 안에는 재가 있더라. 이것 또한 광택 없는 검정.
정이 많은 내가 좋아해 본 적 없는 유일한 색은, 하필 검과 정으로 이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