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스텔 Apr 26. 2023

가족이 그리울 그들을 위해


지난 3월 9일, 런던 사우스뱅크 한복판에 다소 뜬금없는 유리 컨테이너 하나가 설치됐다.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컨테이너 안은 여느 가정집 거실처럼 텔레비전, 테이블 등의 소품으로 꽤 그럴싸하게 꾸며져 있다. 그뿐이 아니다. 정오 즈음부터는 본격적으로 ‘살아있는 전시’가 시작된다. 바로 정시마다 실제 가족이 등장해 친근한 일상을 보여주는 것. 피자를 먹거나 보드게임을 하는 등 일반 가정집 거실에서 일어날 법한 모습이 연출된다. 해당 전시는 해가 질 무렵까지 이어진다. 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조금만 눈을 돌리면 빼곡한 글씨가 보인다. 난민들은 생일과 같은 기념일뿐만 아니라 소소하고 아름다운 일상조차 가족과 함께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현 영국 정부의 엄격한 난민 규정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해당 전시물이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유리 벽 너머의 관객은 평범한 가족이 경험하는 일상적 기쁨을 관찰한다. 그러다 위 문구를 통해 이러한 순간이 난민 가정에겐 그저 꿈과 이상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결코 당연하지 않은 누군가의 시간을, 그 안타까운 현실을 색다른 방법으로 일깨워준 셈이다.



이틀간 지속된 이 전시의 제목은 ‘The Undeniable Wonders of Family Life(부인할 수 없는 가족생활의 경이로움)’. ‘Families Together(패밀리 투게더) 캠페인'의 일환으로 진행된 광고주 ‘영국 국제사면위원회’와 광고대행사 ‘VCCP’의 작품이다. 전시일로부터 일주일 뒤인 3월 16일 열리는 ‘난민 가족 재결합 법안(The Refugees Family Reunion Bill)’에 대한 2차 독회(second reading)는 그 의의를 더한다.


앵거스 맥네일(Angus Brendan MacNeil)

 

앵거스 맥네일(Angus Brendan MacNeil) 하원 의원이 처음 제안한 ‘난민 가족 재결합 법안’은 뿔뿔이 흩어진 난민 가정이 보다 안전하고 수월한 재회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법안의 핵심 주장은 총 세 가지다. 첫째, 기존의 18세에서 25세로 난민가족 자녀로서의 보호대상 범위를 확대한다. 둘째, 타국에 가족을 둔 아동 난민의 경우 가족의 영국 입국을 허가해 삶 회복 및 재건의 권리를 보장한다. 셋째, 필요에 따라 난민 가족 재결합 신청을 위한 법적 지원을 제공한다.



주장에 힘을 보태기 위해 VCCP 에이전시는 유리 컨테이너와 더불어 내부 가족의 모습을 페이스북 라이브로 실시간 방영했다. 또한 런던 내 약 2,000여 대의 택시와 자선단체 SNS 채널을 통해 이와 관련한 다양한 컨텐츠들을 끊임없이 노출시켰다.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난민 구호 메시지에 관심을 갖고 깊이 공감했다. 일부는 트위터 해시태그 운동 ‘#FamiliesTogether’을 통해 옹호의 마음을 대외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는 결국 지역 의원에게 이메일을 보내거나 시위에 가담하는 등의 능동적 참여로 이어졌다. 영국 전역으로 퍼진 변화의 물결은 16일 2차 독회까지 전달됐다. 그렇게 해당 법안은 129대 42로 상임위에 넘겨지는 쾌거를 이룩했다. 아직 법안이 완전히 통과된 것은 아니다. 각 부문 위원회에서 구체적인 조항별 검토를 진행한 후 수정안이 전체회의에 다시 상정될 예정이다. 또 전체회의에서 통과되더라도 최종적으로 상원의 승인이 필요하다. 그러나 하원 2차독회가 법률의 취지를 인정하는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감안하면, 영국의 난민 가족과 난민 인권 보호를 외치는 모든 시민에게 이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다시, 전시가 진행되는 컨테이너 앞으로 돌아와 관객이 되어보자. 따뜻한 집이, 가족의 품이 당연하지 않은 난민의 삶을 상상해보자.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유리에 비치는 우리들이 직접 또 다른 집 혹은 가족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들 곁에서 함께 목소리를 내어 저 멀리까지 전달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언젠가 그들이 잃어버린 가족과의 평온한 일상을 되찾을 수 있도록 말이다.


“위대한 일은 사람이 모여야 가능하다(Great things happen when people come together)”라는 말이 있다. 기꺼이 품을 내어주는 이들의 마음씨를 본받자. 함께 더 넉넉한 품을 만들어 그들을 꼬옥 안아주고 이어주자. ‘가족생활의 경이로움’이 그러하듯 국경보다 사람이 우선이란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지 않은가.





위 글은 과거 에디터 활동 당시 작성한 글을 옮겨놓은 것으로 내용이 현재 상황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매거진의 이전글 지구가 아프면 우리도 아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