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영화 <그녀(Her)>를 보고
당신은 유일하다. 지문 한 점, 머리카락 한 가닥조차 어느 누구와 겹치지 않는다. 개개인은 고유해서 서로 견줄 때 필연적 차이를 갖는다. 다르기에, 그야말로 갈등과 합의의 반복이다. 성가시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고, 한 발짝 물러서 보면 아름답기까지 하다. 개인은 더불어사는 사회인으로 성장하고, 사회는 그렇게 더 많은 이들에게 보다 나은 곳이 된다.
영화 <그녀(Her)>는 기술과 교류하는 우리 스스로를 성찰하도록 하고, 경각심을 일깨운다. 주인공 테오도르 톰블리(Theodore Twombly)는 캐서린(Catherine)과 이혼 절차를 밟는 중이다. 캐서린은 테오도르가 자신으로 하여금 그에게 꼭 맞는 순종적 아내가 되길 바라고 요구했다며, 더 이상 순응치 않고 자아를 지킬 것을 주장한다. “당신은 내가 늘 행복하고 안정적이고 모든 게 완벽한 LA 와이프가 되길 바랐지. 그래서 날 감당 못하고 우울증 치료제에 맡겨버린 거야.” 그녀와 사랑했던 모습을 회상하며 추억에 잠기는 테오도르. 복잡미묘한 감정에 적적한 와중에 사만다(Samantha)를 만난다.
사만다는 맞춤형 운영체제, OS(Operating System)다. 육체가 없다. 물론 살아있지도 않다. 그저 귀에 꽂은 작은 버튼에 깨었다 잠드는 소프트웨어에 불과하다. 사교적인지 비사교적인지, 남성 목소리를 원하는지 여성 목소리를 원하는지, 어머니와의 관계는 어떠한지에 대해 답했을 뿐인데 순식간에 탄생해 말을 건다. 것도 이름이 뭐냐는 물음에 백 분의 이십 일초 만에 ‘아기 이름 짓기’ 책을 완독해 십팔만 개 후보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이름을 고를 수 있을 만큼 유능한 형태로. 테오도르는 분명 실체를 아는 채로 첫인사를 나눴지만, 갈수록 놀랍도록 인간에 가까운, 그의 취향에 가까운 그녀와 24시간 붙어있으며 마침내 사랑에 빠지고 만다. “넌 내게 진짜야, 사만다.” 그렇게 그는 여느 사랑하는 이들과 다름없이 웃음과 생기를 되찾는다. 사랑의 힘은 역시나 위대하다. 언뜻 보면 낭만적이기 그지없다.
그런데, 자꾸만 찜찜한 기분이 드는 건 무엇 때문일까. 나르시시즘에 기반한 ‘맞춤 타자’라는 개념이 있다. 특히 온라인상에서 타인이 자신의 성미에 맞춰줬음 하는, 나아가 그런 타인만을 주변에 나열하려는 자아도취적 자아다. 커뮤니케이션의 균형이 깨진 상태다. 흔히들 사랑은 다른 두 자아가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라 한다. 일체가 된다기보다 동행에 가깝다. 다름을 인정하는 관용, 마찰을 해소하려는 노력 아래 사랑은 쌓이고 점점 더 두터워진다. 테오도르가 갈고 닦는 사랑 대신 이미 가꿔진 사랑만을 고집하기란 가히 ‘게으른 사랑’, ‘수동적 사랑’이란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셰리 터클(Sherry Turkle) MIT 과학사회학 교수는 단발성 정보만 섭취하려는 신인류 현상을 일컫는 ‘골디락스 효과(Goldilocks Effect)’를 제시한 바 있다. 그 속에서 일어나는 ‘가장된 공감(Pretend Empathy)’은 기술에겐 더 많은 것을, 서로에겐 더 적은 것들을 요구하며 함께, 홀로서기를 장려하는지도 모르겠다.
클릭 한 번에 지금껏 관계의 역사가 삭제되고, 여자가 남자가 되며, 원하는 특정 반응을 얻어낼 수도 있다. 기술이 우릴 속이고, 우리가 서로를 속이며, 관계 가운데 실존과 허상의 경계가 흐려진다. 그 경계를 물을 필요조차 없어지는 날, 인류는 돌이킬 수 없는 고독을 맞이할 것이다. 이에 대해 터클 교수는 소통(Conversation)하기 위해 연결(Connection)을 관둬야 한다고 권고한다. 매개된 환경일수록 우리는 끊어지기 때문이다.
영화로 돌아와보자. 테오도르는 편지 대필 일을 하는데, 캐서린을 떠올리며 글씨를 채워나가다가도 수차례 “그저 편지인걸” 하며 평가절하한다. 캐서린과의 추억에 대입해 진심을 담지만, 실제 전해지는 대상이 다르기에 동시에 허구다. 마치 사만다와의 관계를 은유하는 것만 같다. ‘그저 AI인걸’ 대수롭지 않게 되뇌어보지만, 그렇게 쌓이는 공허함은 점차 걷잡을 수 없다.
인공지능이 IQ와 더불어 EQ를 갖추는 때를 꿈꾸는 기술자들에게 묻는다. 과연 ‘감성 지능’과의 친교는 온전한 소통과 관계의 성숙으로 귀결될 수 있는가. 거시적으로 볼 때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길은 어느 쪽일까. 지금 외로움을 달래주는 길일까. 혹 기술이 인간을 살아있는 한 영영 고독한 존재로 전락시키진 않을까.
기술 최소주의를 옹호하려는 게 아니다. 기술은 분명 우리 일상에서 무한한 긍정적 잠재성을 지닌다. 다만, 어디까지나 인간이 만든 기술임을 망각할 때, 인간은 게으른 관계 맺음 속에 관계 맺지 않는 게 아닌 관계 맺는 법을 모르는 인류로 퇴보할 수 있다. 무력해진 인류에 기술이 배신하는 날이 오면, 돌아갈 길이 없다.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로 하루 아침에 사라진 사만다. 하나같이 허공을 향해 웃고 떠드는 외로운 사람들. 테오도르가 진화하는 사만다의 8,316명에 달하는 유저 존재와, 그중 남자친구가 그 말고도 641명이 더 있단 사실을 자각한 때, 그때가 우리에게 닥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사만다는 말한다. “그런다고 덜 사랑하긴커녕 더 사랑하게 된다니까···난 당신 거면서 당신 것이 아냐.” 영화 속 테오도르가 사만다를 만남에도 결국 외로운 건, 사만다가 그를 사랑함에도 떠나야 한 건,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기술의 한계를 단언하려는 감독의 의도였으리라. 결과적으로 캐서린에겐 감정을 숨겨서, 사만다는 인공지능이어서 실패한 사랑이 됐다.
“내가 당신 탓으로 돌렸던 모든 것들, 난 그저 당신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된 거였는데.” 감정을 숨긴 채 살아서 외롭게 만들었다며 캐서린에게 진작 사과할 것을 후회하는 테오도르. AI에겐 미안할 필요도, 용서할 필요도 없었는데 말이다. “당신을 내 틀에 맞추려고만 했었지. 정말 미안해. 함께 성숙해온 당신을 영원히 사랑해. 그 덕에 지금의 내가 있고.” 끝내 음성메시지로 마음을 전하는 그는 에이미와 옥상 위 도심 속 야경을 바라보며 진실을, 진심을 마주한다.
높디높은 곳을 배경으로 한 두 사람의 뒷모습은 한낱 사소하고 왜소한 육체다. 기술의 무한함을 비추려는 의도였을까. 그럼에도 영화 내내 처음 보는 소통(Conversation)이다. 둘 사이 진심이 통함을 아니까. 진정성의 무게가 작은 몸들을 뚫고 나와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내 마음까지 꽉 메운다.
기술의 무한함이 닿을 수 없는 곳, 바로 우리 내면이자 내면 간의 연결이겠다. 문득 고찰하게 된다. 제목의 <그녀>는 사만다도, 캐서린도 아닌 에이미가 아니었을까. 갈등(캐서린과의 이혼)을 넘어, 갈등 없는 기술(사만다와의 이별)을 넘어 또 다른 이의 내면(에이미와의 소통)을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테오도르는 본연의 그를 이해하고, 이해 받는다. 영화 끝에 에이미와 주고 받는 동정 어린 미소와 어깨는 보는 이로 하여금 사람의 온도를 고프게 한다. 저 눈빛은, 저 기댈 곳은 인간만이 가능한, 재현 또는 대체 불가능한 무언가다. 이를 경험해 본 자만이 다시 공유할 수 있을 테다. 복잡한 연결 가운데도 결코 서로의 손을 놓지 않을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