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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열리 Aug 10. 2023

어린 어른

[열리는 삶#003]

상담을 한 번 다녀오면 글을 한 편 쓰려고 계획했었다. 

작년 더운 여름에 첫 상담을 갔던 것이 기억난다. 참 많이도 울고 괴로워했다. 

그리고 다시 여름, 비가 죽죽 내리는 날씨에 물끄러미 밖을 쳐다보다 내 삶의 또 한 챕터가 넘어갔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많은 변화가 있었다.

더없이 가깝던 사람과 멀어지기도, 집보다 자주 가던 곳에 더 이상 발길하지 않게 되기도, 인생의 단 하나의 목표였던 것을 끝내 포기하기도 했다. 


행정고시를 포기하고 힘없이 누워 지냈다. 부모님도 정말 많이 기대하셨던 터라 티를 안 내려고 하시지만 차오르는 아쉬움과 자식이 느낄 슬픔에 대한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그렇게 계절이 가고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게 다시 한 해의 첫 계절을 맞았다. 


일 년 간의 상담 내용을 요약해 보면, 

나는 나 스스로가 못난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됐다. 원래 자존감이 바닥이었기에 이게 무슨 말인가 싶지만 내 입장에서는 꽤 도움이 되는 변화다. 내가 할 수 없는 것과 부족한 부분과 해내지 못한 일들에 대해 나는 늘 자책하고 불안해 해 왔다. 나의 평범함을 받아들이고, 뛰어나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고 나니, 오히려 자존감이 올라가는 경험을 했다. 


모든 것이 내 잘못은 아니라는 생각에 동의하게 됐다. 나는 어떤 일이 잘못되었든지 다 내 잘못이고 내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괴로워했다. 생각해 보면 오히려 그런 태도가 내 교만함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이 다 내게 주어진 일이고, 내가 만약 노력한다면 전부를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평범한 나는 애초에 내게 주어지지 않은 책임과 능력 밖의 일들을 마음에 들이지 않는 연습을 하고 있다. 이제야 나는 진짜 내 역할을 찾아갈 채비를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직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기도 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 닫힌 세계는 어떻게 생긴 건지, 어디에 있는 건지를 도저히 모르겠다. 다만 그만두지 않아도 될 정도의 힘듦이라 잠잠히 하루하루를 느릿한 마음으로 보내고 있다. 


매주 한 번씩 상담에 가는 것도, 하루에 두 번 약을 챙겨 먹는 것도 습관이 됐다. 그리고 오랫동안 내게 뿌리내린 이 우울도 침착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여전히 나는 우울증을 앓고 있다. 그리고 우울하다. 잘 참아내다가 한 번씩 터져 나오는 눈물에도 익숙하다. 이상하게도 안정적인 우울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 나이를 적용한대도 20대 초반이 될 수 없는 어른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은 갓 태어난 강아지의 발바닥처럼 쉽게 새로운 곳에 발을 디디기 쉽지 않다. 감정에 잠겨서 지낸 시간 동안 나는 사회적으로 더욱 어른이 되었는데, 어린 마음은 자라기를 멈췄다. 

이 새로운 챕터의 시작에서도 활기차고 힘이 넘치며 의욕적인 모습은 될 수 없다. 다만 오래 멈춰있던 생각공장이 켜켜이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움직일 준비를 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이제 어떤 생각을 만들어낼지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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