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에서 2020년으로 넘어오던 시기,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이 팬데믹으로 드러나기 이전, 세계를 뜨겁게 달군 한가지 화두는 그린뉴딜(Green New Deal)이었다. 그린뉴딜이라는 아이디어의 대전제는 기후변화와 생태계 악화라는 위기에 대한 불안 섞인 자각이다. 달리 말해, 이 위기의 연원인 화석연료(fossil fuel, 간단히 줄여 탄소) 산업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앞으로 등장할 모든 그린뉴딜 관련법의 대원칙은 이처럼 화석연료와 얽혀 있는 현재의 경제를 어떻게 수술할 것인지와 관련되어 있다.
실로 지난 2세기는 화석연료의 세기였다. 화석연료, 즉 석탄(coal)과 석유(petroleum), 천연가스(natural gas)가 아니었다면 지난 2세기의 산업자본주의 경제의 성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새삼스레 정의하자면, 화석연료는 지구 표면의 심층에 매장된 채 수백 만년 간 변형을 거듭하여 발생한 독특한 식물 잔해물질로, 연소함으로써 사용할 수 있는 연료를 뜻한다.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연료의 결정적 특징은 재생(renewal)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재생이 안 된다는 것은 소진되고 만다는 것, 따라서 어느 시점부터는 더는 공급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오던 시점, 유럽에서는 석탄 생산량이 큰 폭으로 증가하기 시작해서 19세기 내내 증가세를 유지한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목재 생산량의 감소다.) 한 통계에 따르면, 1800년 세계 석탄 생산량(약 1천만 톤)은 100년이 지난 1900년경 약 76배까지 치솟는다. (약 7억 6천만 톤) (Clive Ponting, A New Green History of the Word, p. 281) 물론 이것은 자본주의 중심부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이 중심부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19세기는 석탄의 쓸모를 재발견한 세기였다.
그러나 석유에게는 19세기가 아니라 20세기라는 짝을 붙여주어야만 한다. 석유가 상업용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건 19세기 후반기, 정확히는 1859년부터이지만, 19세기 후반기에 생산된 석유의 양은 소량이었고, 그것도 대부분 조명(등불)용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산업화된 세계에서 석유가 화석연료로서 ‘제 실력 발휘’를 하기 시작한 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내연기관이 개발되면서부터였다. 내연기관의 발명과 혁신은 석유에서 돈 냄새를 맡은 이들의 열정에 기름을 부었다. 1909년경 대영제국의 왕립해군(Royal Navy)의 기관실에 석탄 대신 석유가 들어가기 시작했고, 1930년경에는 휘발유가 석유산업의 주요 생산품으로 등극하게 된다. 1940년 세계의 석유 생산량은 1890년에 생산된 양의 29.4배에 이른다. (Clive Ponting, A New Green History of the Word, p. 286) 석유 생산량의 폭증은 내연기관을 장착한 (육, 해, 공) 교통수단의 발달이 촉발한 셈인데, 이것은 단연 20세기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20세기 초반의 석유 생산량 증대는 특히 1900~1920년대의 미국 자동차 산업의 발전과 연관성이 높았다. 1900년경, 미국에 있던 자동차는 겨우 8,000대에 불과했다. 그뿐 아니라 1900년대 대부분에 미국 도시와 시골의 도로를 달렸던 자동차들은 소규모 제조업자들이 소량으로 생산한 제품들이었다. 그야말로 다양한 제품들이 쏟아져 나온 난립의 시대였다. 사태는 1913년에 뒤바뀐다. 혁명의 주인공은 ‘자동차 왕’ 헨리 포드(Henry Ford)로, 그는 디트로이트 시에 소재한 자신의 공장에서 컨베이어 벨트 조립 라인을 선보이며 자동차 대량생산의 새 시대를 연다. 대량생산이 가능해지자 자동차 가격이 하락했고, 그러자 수요가 급증했다. 그렇게 사태는 돌변했다. 미국 내 자동차 소유주는 1905년 약 8만 명에 불과했지만, 1922년엔 1,000만 명으로 늘어난다. 1930년이 되면 약 2,600만 대의 차량이 미국 땅을 달리게 된다. (반면 유럽에서는 1950년대가 지나서야 1920년대의 미국 수준으로 자동차 수요가 증가했다.) (Clive Ponting, A New Green History of the Word, pp. 329-330) 자동차 수요의 폭발이 휘발유 수요와 공급의 폭발로 이어졌으리라고 추정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20세기 석유산업은 실은 석유화학 산업이었고, 20세기 문명의 이름 역시 석유 문명이라기보다는 석유화학 문명이었다. 석유는 선박, 자동차, 항공기 산업 종사자만 먹여 살린 것이 아니었다. 석유는 전통적인 생산의 세계, 즉 농업의 세계에도 발을 들여놓았다. 농업이 기계화, 산업화되면서 석유로 가동되는 농기계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토마토나 바나나를 먹을 때 석유도 함께 먹기 시작했다. (농산물 소비는 곧 석유 소비를 의미했다.) 한편, 석유의 한 형태인 아스팔트(asphalt, bitumen)는 도로포장재로 쓰이며 전 세계의 도로를 점령했고, 이로써 지구 표면의 역사를 다시 썼다. 석유가 점령한 장소는 농지나 도로만이 아니다. 석유는 사람들의 삶의 감성(에토스)과 분리하기 어려운 생활세계 깊숙이 침투했다. COVID-19 이후 사용량이 폭증한 (얼굴용) 마스크의 끈, 여성용 스타킹 등에 사용되는 나일론(nylon), 합성섬유의 일종인 레이온(rayon), 포장재나 양초 등에 다양하게 사용되는 왁스(wax), 이 모두가 석유가 아니었다면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합성물질들이다. 더 중요하게는, 숱한 플라스틱들이 석유를 원료로 제작되었고, 이전이라면 고래뼈 같은 것으로나 제작했을 제품을 플라스틱 제품들이 대체했다. 우리 시대의 골칫거리인 플라스틱 오염 문제는 분리배출을 잘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유통기업들의 포장재 사용을 규제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
당장 거실과 주방에 널려 있는 사물, 마트에서 유통되는 제품들을 살펴봐도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아직 우리는 석유가 아니라면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을 삶을 살아가고 있다. 환언하면, 20세기가 시작된 이래 (적어도 ‘산업화된 세계’에서) 2020년까지 호모 사피엔스는 한곁같이 석유동물로 살아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약 1,500개의 거대 유전(油田, oil field)에서, 최소 50만 개가 넘는 유정(油井, oil well)에서 석유 생산이라는 이름의 전쟁이 수행되고 있다.
아마도 기후위기니, 해양 생태계 오염이니 하는 문제는 지구나 바다가 우리의 삶과 크게 상관없다고 오해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외면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설혹 그런 사람이라 해도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값싸고 품질 좋은 석유의 생산이 향후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문제가 그것이다. 이것은 이제까지 당연하게 누렸던 것들이 미래의 어느 시점부터는 결코 당연하게 누릴 수 없는 것들이 된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석유의 최대공급속도(85mb/d, 1일 8500만 배럴)를 의미하는 석유 정점(peak oil)이 2010년이냐 또는 그 이후냐는 논쟁이 있지만, 실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인류가 양질의 석유를 이미 대부분 추출했고 따라서 품질 낮은 석유를 과거보다 더 열악한 지질, 지정, 지리적 조건에서 추출해야 한다는 사정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는 단위당 생산단가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무엇을 해야 할까? 무턱대고 ‘그린뉴딜’이라는 깃발 아래 모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지난 2세기 동안, 특히 20세기가 시작되면서부터 인류가 지하에 매장된 화석연료를 꺼내 쓰며 매우 특이한 삶을, 번영이 곧 파괴인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