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을 읽고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목정원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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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예술과 관련된 내용을 삶에 병치해 여러 이야기들을 풀어나가는 공연평론가 목정원의 이야기들. 듣기만 해도 흥미진진한 경험에 귀가 솔깃함을 더해 꾹꾹 눌러 담은 그만의 이야기, 그것의 깊고 단단함에 홀리게 된다. 나를 알고자, 누군가를 알고자, 우리를 알고자 하는, 무대를 알고자, 공연을 알고자, 대상을 알고자 하는 작은 마음들이 모여 세상을, 세계를 알아보고자 하는 큰 마음으로 이어진다. 글을 부리면서도 온전한 마음을 전달할 수 있음에 놀라고, 그 마음에 하나같이 공감 할 수 밖에 없음에 감동한다. 쓰는 이의 마음을 빼닮은 부드러운 말들이 이 여정을 편안하게 만든다. 마치 함께 거리를 거닐며 대화하고 옆자리에서 공연을 본 것 같이.
“우리는 매 순간 무언가를 바라보고, 이미 본 것과 지금 본 것을 연결하며, 그렇게 펼쳐가는 의식의 지형도로 생을 꾸리고, 자신을 구축한다.“(54p) 극장에서 연극을 보듯 우리 또한 삶의 중심에서 내 주변을 이루는 것들을 보며 살아간다. 보는 것으로 말미암아 세계를 구축하는 일은 우리 삶의 토대를 이룬다. “우리의 시선은 때로 무언가에 막히고, 충격으로 아득해지고, 성찰의 거리를 취하고, 다시금 용기와 다정으로 몰두하고, 기필코 뒤돌아 나 자신을 또한 응시함으로써 굳건해진다.”(54p) 토대를 이루면서도 지난한 일련의 과정들을 겪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한다. 삶을 바라보는 일이 매끄럽다면 생은 아프지도 아름답지도 않을 것이라며.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기, 손 탈탈 털고 다시 내 삶의 앞을 바라보기. 내 다짐과 궤도를 같이 하는 글 속에서 한껏 유영하며 지냈다. 고요하면서도 편안한 침묵 속에 더없이 즐거웠다. 본인이 펼쳐가야만 하는 연극에서 나는 부끄럽지 않게 당차고 적극적으로 무대 위에서 뛰어놀 것을 주문한다.
사라짐. 시간에 깃들어 발생했다가 그 흐름과 더불어 종결되는 것. 공연예술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말하는 그 사라짐. “더 이상 존재가 없으므로 점차 기억은 희미해진다. 그 중 어떤 기억은 뒤바꿀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몸에 기입된다. 그렇다 해도 흔적이 남는 것과 존재가 남는 것은 아득히도 다른 일이다. 시간예술의 근본에는 슬픔이 있다”(83p) 공연이라는 다른 세계에서 나오면 다시 삶의 세계로 돌아갈 수 밖에 없음은 막이 다시 쳐지고 조명이 켜짐으로 동공이 그것에 적응할 때 비로소 깨닫는다. 순간이 지나면 잡을 수 없는 것, 아름답고 행복했던 것들은 끝내 잊히기 마련이다. 가끔 들추어보기 위해, 더 오래 기억하기 위해, 자신을 응시함으로써 단단해지기 위해. 지나가는 슬픔은 슬픔대로 흘려보내고 천천히 몸에 남기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그런 기억들의 파편을 모으며 살고, 아주 작은 것들을 삶에 새기면서 사는 게 아닐까.
허나 흘려도 흘려도 깊이 각인되어 남는 것들은 또 있기 마련. “만나지 못하는 것을 만나지 못하는 것으로 두는 일에 너무 마음 아파하지 않는 법을 습득하는 것. 흘러가 사라지는 삶 속에서 어쩌면 모두에게 훈련 되었을 그것”(134p). 매 순간 선택을 강요하는 삶에서 모두 각자만의 방식으로 훈련을 한다. 나로서는 아직 뾰족한 방법을 알지 못한다. 먼 발치에 내팽개쳐 두었다가 그래도 시선이 가닿으면 깊은 땅을 파 묻어버린다. 그런데 알다가도 모르게 미친 듯이 파헤치기도 한다. 무뎌져야 하는데, 슬픔을 견디기 위한 나의 연습은 아직 미완이다. 어설프기 짝이 없다.
저자는 이스라엘 무용수에게 춤을 배운다. 제각각의 사람들이 잘 추지 않아도 그 행위 자체를 즐기는 것을 본다. 그리고는 춤의 근간이 되는 몸을 생각한다. “어떤 것이 되돌아오는 자리에는 언제나 몸이 있다. 몸이 먼저 마중 나가 제 호흡을 되찾는 일.”(154p) 몸을 푸는 과정을 통해 삶의 호흡을 되찾는 것을 연결한다. 그리고 ’본다‘는 행위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것들은 우리의 몸 안에서 공명함으로. 오직 공명함으로써만 우리를 건드리므로.”(154p) 삶의 궤도를 찾기 위해서 나 역시 보는 것의 중요성을 실감한다. 보고, 생각하고, 느낀 것으로 내 삶은 이루어져 있고 그 이루어진 것들을 다듬는 과정에서,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성취를 찾는다. 툭툭 건드려지는 마음들의 근원을 찾고 그것들이 안내하는 방향으로 살아가리라 다짐한다.
몸을 풀어서 몸이 데워진다. 리듬을 맞춰보면서 밸런스를 생각한다. 프랑스어 echauffement는 직역하자면 ‘데우기’이다. “우리는 서로를 알게 됐고, 다시 알아봤고, 서로를 잃었고, 다시 떠나갔고, 서로를 되찾았고, 다시 데워졌네. 여기서 다시 데워짐은 다시 사랑함의 또 다른 표현. 한때는 각자의 소용돌이 속에서 떠돌았으나, 이제는 다시 사랑하여, 서로를 끌어안은 채 영원히 회전하네”(154p). 다시 관객이 되기 위하여 우리에게 몸풀기가, 다시 사랑하는 일이 필요할는지 모른다고 한다. 그것을 확장해 받아들인다. 삶이라는 연극에서 다시 주인공으로 자리 잡기 위함으로. “무언가를 응시하기 전에 그것을 먼저 사랑하는 일. 사랑하는 만큼 보기 위해서. 우리는 제 몸속에 기입될 또 다른 몸을 맞을 준비를 한다. 이것이 사랑이다. 당신의 몸에게 가까이 가기. 당신이 감각하는 대로 세계를 만나보기. 나의 몸을 가지고 당신의 고통 속으로 거주하러 들어가기.”(154p) 몸과 마음을 다듬어 나의 사랑을 키우고자 한다. “아름답게 보이기보다 주어진 행위를 다하는 데 몰두하기. 보는 일이 아닌 움직이는 일의 즐거움을 느끼기. 떠나보내고, 들여놓기. 말하자면 행복하기. 우주와 닿아 있기.”(156p) 완벽하지 못할지라도, 훌륭한 무언가를 해내고 싶다. 나만의 리듬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리라 다짐한다.
“모든 의도와 편견을 지운 채로 객석에 앉기. 공연을 보는 동안 생각으로 미리 앞서 많은 것을 정리하려 들지 않기. 그 재단된 사유를 빠져나갈 수 밖에 없는, 살아있는 모든 모순 앞에 감각을 열어젖히기. 그러다 한 장면, 한 문장, 한 몸짓에 기어코 걸려 넘어지기. 그렇게 건드려지기. 건드려진 가슴을 꼭 안고 나와 그 지점으로부터 글을 써 내려가기, 그것이 진실과 교류하는 나만의 비법.“(165p) 작품의 진실을 보는 것에 생을 걸었던 비평가의 태도를 내가 지키고자 하는 중심의 태도로 삼는다. 내가 해온 생각과 행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면 앞으로 생길, 닥쳐올 일들이 나를 바꾸어갈 것이다. 한 치 앞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작은 아름다움과 큰 고통, 사라지는 것과 생겨나는 것들로 나는 휘청거리고 쓰러지기를 원한다. 실패를 수없이 겪고도 꺾이지 않는 나무처럼 단단해지기를 원한다. 저자가 연극을 통해 다른 세계에 가기를 원했듯 나는 내 삶에서 다른 세계를 찾기를 원한다. 그곳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나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