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은 내가 백수임을 알고 있었다.
아직 동이 트기도 전인 어두운 새벽 무렵 화장실이 급해 눈을 떠야만 했다. 우중충한 날씨가 몇 주 째 계속되고 기온은 롤러코스터를 타 듯 하지만, 영하의 날씨가 아님에도 따뜻한 이불 밖을 나오기는 왜 그리도 힘든지 말이다. 너무 피곤하였지만 아내를 기다리며 버티다 잠들었던 터라 날 깨워야만 했던 방광이 야속하다. 평소 미천한 체력으로 살아왔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피곤할 줄이야... 늙었다.
거울에 비친 초췌한 모습을 보며 다시 침대로 향할까 잠시 머뭇거렸지만,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결국 멍을 소환해 보기로 하고 소파에 앉았다. 어제의 일이 다시 떠오른다. 잠도 몇 시간 자지 못한 채, 만날 기회를 놓치면 만나자는 말만 하는 사람이 될까 싶어 부지런을 떨며 알던 분을 만나고 왔다. 별로 특별한 말을 하진 않았지만 난 내심 혹시라도 말실수를 할까 봐 매우 긴장을 했었다. 공자는 내 나이 때면 그다지 흔들림이 없어야만 한다고 했던 것 같지만, 나처럼 하지도 않은 일과 의도하지도 않은 말들 때문에 험담과 모함에 시달려 본 사람들은 자기 입에서 뛰쳐나가는 단어 하나가 얼마나 자기를 힘들게 할 수 있는지 알 것이다.
전에 다니던 직장을 통해 오랜 시간 동안 알고 지내던 분이지만 자주 뵐 수는 없었고 회사를 그만두기 1~2년 전부터는 문제가 생겨도 웃으며 좋게 협조해 주시던 고마운 분이었다. 직장인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잘못도 아닌데, 욕 아닌 욕을 들어야 하는가를 생각하단면 그분은 좋은 분이 맞았다. 내 근무 시간 때문에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을 하나 둘 만나는 재미(?)는 백수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며 계획들을 세워도 보았지만 혹여나 또 말실수할까 봐 접고는 했다. 그러나 이 분은 유난히 만나고 싶었다.
그냥 예전 지점장들 얘기와 요즘 사는 얘기 그리고 변하지 않는 미모와 나잇살을 탓하는 얘기 등 시시콜콜 이 동네 이웃들과 수다 떨 듯하고 왔지만, 그분은 내가 왜 사무실까지 방문했는지 그 의미를 알고 있다는 듯 좋은 자리 나 기회가 보이면 연락을 주겠다고 중간중간 말했다. 난 시간 내서 날 만나주고, 백수가 찾아왔으니 그런 이유겠거니 하며 신경 써주시는 거라는 생각에 마지막에는 무심코 정말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하고 말았다.
정말 그런 부탁을 하려고 찾아간 게 아니었는데... 그냥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넘겨도 되는 건데...
졸음운전을 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뜨며 집에 돌아왔지만 텅 빈 집에서 혼자 잠들기는 싫었다. 왠지 모를 씁쓸함도 생기고 내가 그런 존재로 보일 수밖에 없는 위치구나 하는 생각에 힘이 빠진다. 그리고 곱씹어 보면 내 마음속 한 구석에 은근히 도움받기를 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빨래도 시작하고 설거지도 하고 반찬거리도 만들며 부지런을 떨어 보지만 쉽게 털어버리기 힘든 뭔가가 자꾸만 날 우울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평생 지독히도 나를 괴롭히던 우울증도 이젠 많이 나아졌다 믿었는데 이렇게 방심을 틈타 가끔씩 훅을 치며 들어오는 이것은, 비록 그 회수는 예전보다 줄었지만 아직도 날 며칠씩 웅크리게 만들 만큼 세기만 하다. 그래 다른 것을 생각해 보자라고 하는 순간 '혹시 말실수는 없었는지...'라는 또 다른 펀치를 맞고 말았다.
'아... 있었다.'
자책감이 우울증에 절대 도움이 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난 결국 이 두 펀치를 맞고 쓰러졌다. 부엌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두 팔로 나 자신을 안아주며 괜찮아, 괜찮아하며 위로만 해야 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인생의 절반을 살아왔음에도 아직도 낯설다. 회사를 준비 없이 떠나온 것이 벌써 두 번째다. 이번엔 정말 준비해서 나올 거라고, 남들 보란 듯이 더 좋은 곳으로 옮길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구설과 오해 그리고 답 없는 업무들은 결국 날 지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번개 맞아 부러진 나무처럼 꺾여버린 자존심과 (어차피 자존감 같은 건 키우고 살지도 않았다.) 오해받은 의지들을 뒤로한 채 도망치듯 나와 버렸다.
누군가 도와주겠다는 성의라도 보여주는 것이 참 고마운 일이고 많은 이들이 이 따뜻한 말 한마디도 못 듣고 살아갈 텐데, 난 부질없는 자존심에 그게 듣기 싫었나 보다. 난 괜찮으니깐, 내가 알아서 내 삶을 살 테니 동정 따위는 하지 마쇼~라는 그런 오만함이었다. 그리고 그 오만함으로 나 자신을 자신감이 많은 사람인 마냥 잘 포장할 줄 알고 있었다.
곧 아내는 집에 돌아왔고 난 아무렇지 않은 척,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등 일상의 대화를 하며 씩씩하게 침대에 누워 더 이상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이른 새벽 조용히 혼자 소파에 앉아 멍하니 있을 수 있는 여유를 사랑하지만, 마음속에 떠오르는 기억들이 힘들 때는 차라리 무언가 할 일을 찾아본다.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하던 빨래를 마저 세탁기에 돌려놓고 종종거리며 돌아다니다가 다시 펀치를 맞을 것 같을 때쯤, 이렇게 글을 쓴다. 다른 무언가에 정신을 쏟으면 괜찮아지겠지 하는 기대보다는 차라리 글로 풀어내기라도 하면 정리가 되겠지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늘 그래 왔듯이, 난 오늘부터는 더 말을 줄이고, 준비 없이 떠나 온 예전 일터는 나에게 버림을 받을만한 곳이었다고 상처 난 자존심에 혼자만의 위로라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