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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씨 May 18. 2021

서른일곱, 대학교수를 그만두다

멈출 수 있는 힘, 길은 걸어감으로써 비로소 만들어진다

스물아홉 영화전공 석사 과정 마지막 학기, 당시 나는 영화를 만드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던 터라 석사 졸업영화를 마무리하고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때였다. 나름 국내외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지만 어디서 불러주는 것도 아니고 영화 현장 또한 스물한 살에 나갔던 경험에 비추어 별로 예술적인 것 없는 단순 노동의 현장일 것 같은 고민에(영화 현장이라는 것이 감독이나 실장급이 아닌 다음에야 대부분 단순 노동이다.) 취업과 예술 뭐 그런 쓸데없는 고민들로 매일을 채워가던 날들이었다.


'대학 강의 한번 해 보지 않을래?' 선배의 말 한마디로 대학 강의를 시작했다. 석사, 박사 과정의 학생에게 대학교 강의란 강의 지역을 떠나서 정말 소중한 기회이기도 하고 앞으로의 경력을 위해 꼭 필요한 시작이기도 했다. 나는 운이 좋게도 그런 기회가 너무나 우연하게 쉽게 찾아왔다. 아마도 그 당시에 국내에서는 조금 희귀한 프로그램 관련 국제자격증을 취득한 터라, 나의 실력이나 경력 그런 것보다는 자격증 유무가 크게 적용을 했던 것 같다. 그게 FCP라는 영화 편집 프로그램인데 그 당시 해외에서 많은 사용자가 있는 반면 국내에는 별로 없는 상태였다. 나름 공부라는 것을 해서 비싼 비용을 들여 강좌를 듣고 트레이너 자격을 취득했었다. 그렇게 힘들다기보다는 기회비용과 시간이 좀 많이 들어갈 뿐 어려운 일은 아니었는데 사람들이 별로 관심이 없었던 탓인지 내가 자격증 취득 당시 국내에 애플 공인 FCP 트레이너는 네 명에 불과했었다. 


그렇게 지방의 예술대학교에서 영화 촬영, 영화 편집 강의를 시작했다. 대학강사 강의료 만으로는 생활이 안되기 때문에 동시에 학교 예술강사, 보육원 예술강사도 했었다. 지금의 방과 후 교사 비슷한 건데 초중고 학교 그리고 보육원에 파견되어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영화 체험 학습 같은 수업을 진행하는 거였다. 몇 년 을 그렇게 서울-서산-논산-온양-세종 첫차로 출발해 집에 들어오면 10시가 다 되는 생활을 했다. 하다 보니 강의하는 대학이 하나 둘 더 늘고 매번 비슷한 말로 떠들며 몇 년 수업을 하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기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보통 강의라 생각하면 대충 자료 챙겨 가서 몇 시간 떠들고 실습시키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거장이 아닌 다음에야 나 같은 공고 출신은 강의 준비시간이 많이 걸린다. 다음날 3시간 강의면 준비 시간은 3시간 이상이 걸린다. 아는 것과 아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그렇게 강의 준비가 부실한 상태에서는 늘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항상 '이거 쪽팔린 건데...' 이런 생각을 하며 올라왔었다. 그렇게 6년 정도를 보냈다.


'나는 대학 교수가 되고 싶었지?' 나는 대학교 교수님이 되고 싶었다. 자세하게 설명을 하자면 4년에 한 번 안식년마다 세계여행을 하고 싶었다. 이게 가장 큰 이유였다. 교수가 되기 위해 집중과 선택이 필요했다. 다른 강의는 모두 그만두고 대학교와 센터 강의만 하기로 했다. 사실 강의료만 놓고 보면 대학교보다는 다른 강의들이 훨씬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교수 임용에서는 대학 강의 경력만 인정이 되었기 때문에(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같은 강의를 했어도  2년제 4년제 인정되는 시수가 다르다) 대학 강의만 하면서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박사과정 수업이 너무 재미있었다. 몇 년 만에 느껴보는 배움의 즐거움? 학생이 된 느낌? 그런 게 있었다. 박사과정을 하며 대학교 수업을 하고 그렇게 바쁘게 1년여를 보낼 즈음 임용 원서를 넣었던 한 대학에서 서류 합격이 되고 최종 총장 면접까지 올라갔다. 그게 서른일곱이었다. 일주일 정도 뒤에 최종 합격자 발표를 학교 홈페이지에서 확인했다. 뭔가 화가 난 다기 보다 그냥 짜증이 났다 '이번엔 나가린가?' 화가 나지 않았던 이유는 나와는 너무 차이나는 경력과 실력이 있는 분이 임용되어서 위안을 받았던 것 같다. 반면에 자신감도 생겼다. '나 같은 지금 상태에서도 뭔가 좀 해보면 그래도 최종 면접까지는 가는구나 뭐 이런 생각?' 그 뒤로 한 두 군데 임용 원서를 더 넣었다(영화전공은 IMF 이후 2000년 한국영화의 르네상스와 함께 영화과 정원이 늘며 임용된 교수님들이 많아 T.O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한 10년은 더 있어야 자리가 좀 있을까 말까였다.) 그중 한 군데에서 또 최종면접 연락이 왔다. 서울에 있는 예술학교의 영화과였다. 


"교수님 학교로 오시면 됩니다" 합격이었다. 나는 교수님이 된 거다. 몇 년 전 영화제에서 상 탔던 이후로 그렇게 혼자 이불 킥하며 기쁨을 만끽하기는 오랜만이었다. (나는 친구가 별로 없다 아니 가까이 있는 친구가 없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원서를 넣었던 영화과에 예전에 나를 가르친 적이 있던 교수님이 계셨다. 내가 학생 때를 예쁘게 기억하셨는지 해당 학과 회의 때 나를 좋게 이야기해 주신 것 같다.(대학교수 임용의 50%는 운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드디어 교수가 되었지만 뭔가 좀 이상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생각했던 교수와는 많은 부분이 달랐다. 예를 들면 다른 대학도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교수는 테뉴어 Tenure가 아니다. 이 말은 대부분의 교수는 계약직인 거다. 1년 단위로 연구업적 실적 뭐 이런 것들을 기준으로 재계약을 한다.(범죄나 파면 등의 중대 문제가 아니면 대부분 계약은 연장된다) 대학은 교육기관이기 이전에 기업이다. 교수들은 다른 회사원들과 마찬가지로 출퇴근 도장을 찍으며 학과의 실적(대부분은 자퇴생이나 휴학생이 없게 관리)과 인기도(인기가 많은 학과가 정원을 늘릴 수 있다)에 신경을 써야 하며 신입생 유치에 많은 시간을 써야 한다. 한 달에 몇 번은 고등학교에 정수기 영업사원처럼 방문해서 애들 대상으로 사탕발림을 해야 하는데 이것도 할 때마다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더 많은 썰을 풀기에는 소송이 들어올까 봐...) 그래도 좋다. 나는 교수가 된 거니까. 이 얼마나 기다려온 근 8년 만의 결과인가. 그렇게 임용이 되고 나서 박사과정을 휴학하고 학교에만 전념했다. 수입은 더 줄고(교수 연봉은 그리 많지 않다) 일은 더 많아지고 스트레스는 최고치를 찍고 있었다. 

친구들의 축하 자리 (소주잔에 따라진 맥주가 인상적이다)
촬영 수업 중



'이렇게 살다가 뭐가 되는 거지?' 이렇게 교수를 하면서 살다가 뭐가 되는 걸까? 연구는커녕 공부할 시간도 더 없어지고 회사의 일원으로 회사의 이익을 위해 학생이라는 고객을 관리해야 하는 그런 뭔가 내가 원하지 않았던 형태의 일을 하며(개인적인 견해이며, 특정 학교의 문제일 수 있다. 그리고 연봉이 높았으면 이런 생각을 안 했을지도 모른다) 살다가, 그러다가 뭐가 되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늙어서 정년퇴직이란 걸 하고 통닭집을 차리는 일은 더더욱이 하기 싫었다. 그런데 어느 날 뭘 먹어도 속이 계속 쓰리고 답답한 게 지속되길래 스트레스 때문이겠지 생각하고 생각난 김에 난생처음으로 위 내시경이나 해보자 해서 내과를 찾았다. 처음 해보는 수면내시경의 프로포롤 느낌은 정말 좋았다. 한 20년 자고 일어난 개운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개운함 과는 반대로 검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죽을지도 모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뭔가 신기하게 위나 다른 부분은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피검사 결과 간 수치가 간경화 직전이라는 것이었다. 더 신기한 건 나는 원래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럼에도 간 수치가 이 정도로 나왔다는 건 다른 큰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의사 말로는 평생 약을 먹고 스트레스받거나 과로하지 않는 생활을 해야 제명에 죽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이 말을 요약하면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벌고 스트레스받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뭐 그런 말이다. 사람이 이런 생사의 갈림길에 잠시라도 서보게 되면 갑자기 인문학자 철학자가 된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잊고 지냈던 인문학적 삶 그리고 나의 철학이 뇌에서 콸콸콸 흘러나와 전두엽을 자극했다. 그 자극들은 나로서 사는 게 뭔지, 호스피스 병동에서 환자가 마지막에 하는 말들이 뭔지 그런 질문들의 해답을 굉장히 쉽게 찾게 해 준다. 


서른일곱, 대학교수를 그만두다 나는 일주일 정도 고민하다가 학교를 바로 그만두었다. 그 과정과 명분 등을 설명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져 할 수 없지만(정말 굉장히 재미있다) 일주일 생각하고 바로 그만두었다. 도의적인 명분은 충분했다. '나는 아직 해보고 싶은 게 많으니까 나는 일하다 과로사로 죽기 싫으니까 게다가 요즘 교수는 안식년도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학교를 그만두는 건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멈출 수 있는 힘은 끝이라는 두려움에서 나온 것 같다. 아마도 이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자 나 자신이 나로서 사는 시작이었다. 지금의 사회 분위기는 뭔가에 떨어지거나 실패하거나 그만두면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어릴 때부터 아주 잘 심어주고 있다. 대부분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한다기보다 기업이 원하는 공부를 해서 고급 SCV가 되려고 죽어라 노력하고 진짜 죽어가는지도 모르는 채 살고 있는 것 같다. '사람은 절대 쉽게 죽지 않는다 죽을 때 우스워서 그렇지' 대학시절 매일 동아리 방에서 술 취해 자던 노숙자 같던 그 선배들도 다 안 죽고 살고 있다. 서울역과 용산역을 주변으로 무료급식소도 4군데가 넘는다. 당장 그만두고 이걸 하지 않는다고 해서 굶어 죽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모아놓은 큰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빌딩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선 전셋집을 빼서 그지 같은 학자금 대출을 모두 상환하고(박사까지 하니 뭐 이래 비싼지) 카드값을 처리하고 이래 저래 남은 돈을 보니 밥을 지어먹고 산다는 계산하에 1년은 굶어 죽지 않을 것 같았다. 모든 부채를 처리하고 나니 평소 느끼지 못했던 자유가 느껴졌다. 보통 대학교를 들어가면서 대부분 부채자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학자금, 카드값, 할부, 핸드폰 요금 이런 것들이 다 부채에 해당한다. 이 부채가 없으면 삶 자유로울 수 있는 시작점이 된다. 


바로 필리핀의 작은 섬 보홀로 가는 비행기 표를 샀다. 죽기 전에 하려고 했던 꿈, 세계여행을 시작하고 싶었다. 다행인지 운이 좋았던 건지 수중촬영을 하면서 강의 때문에 스쿠버다이빙 관련 강사 트레이너 자격증이 있었다. 거기 가서 다이빙 강사라도 하면 굶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했다. 병원에 가서 약을 6개월치 타고(전문의약품이라 구하기가 힘들다) 일주일 뒤 비행기를 탔다. 나는 살기 위해 모든 부채를 정리하고 필리핀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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