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 창궐> 미국은 강대국이지만, 선진국은 아닙니다
어제 집으로 ‘백악관’ 발 우편이 날아왔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을 위한 코로나 바이러스 가이드라인>이라는 제목의 엽서 뒷면에는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늦추기 위한 지침이 담겨 있습니다.
아프면 집에 있어라, 특히 노인이나 병자들은 다른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어라, 만남을 피하라, 양로원, 장기 요양원 등에 가지 마라, 물건 만지고 나면 손 씻어라, 얼굴 만지지 마라, 기침 재채기는 휴지나 소매 안쪽에 해라, 자주 쓰는 물건 반복적으로 닦아라... 는 일반적인 내용이고 ‘자신의 재량에 따라 이동하는 것을 피하라’는 지시가 색다른 정도일 뿐입니다.
재선에 신경 쓰느라 코로나 바이러스 방역을 놓친 트럼프와 잘못된 진단 키트를 보내 창설이래 가장 많은 욕을 얻어먹은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 CDC가 뒤늦게나마 체면치레하려고 보낸 엽서로 보입니다. 굳이 ‘미국을 위해’ ‘트럼프 대통령’이 보냈다는 강조를 한 건 사실상 선거 캠페인이라고 봐야겠죠. 현직 대통령으로서 실행할 수 있는 수단을 최대한 이용한 겁니다.
1. 왜 ‘엽서’인가
초고속 무선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에도 미국 사람들은 편지, 엽서 등의 우편물을 상당히 자주, 많이 주고받습니다. 개인 취향도 있지만, 인터넷이 없는 인구가 1천9백만 명, 전체 인구의 6%에 달합니다. 특히, 이 같은 인터넷 소외 인구 가운데 1천450만 명이 교외 지역에 분포돼 있습니다. 면적이 러시아 캐나다에 이어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크다 보니 인터넷 선 깔기도 쉽지 않겠죠.
인터넷이 없으면, TV로 뉴스 보면 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TV 보유량은 늘고 있지만, 유료 방송 서비스를 중단하는 ‘코드 컷팅’ 가구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습니다. 한 달 시청료가 보통 $150에 이르러 가계에 부담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CNN, NBC, ABC, CBS 등 주요 뉴스 채널이 유료방송 패키지에 묶여 있어서 유료 방송을 보지 않으면 뉴스에 대한 접근성도 떨어집니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미국에선 뉴스가 공공재가 아닙니다.
2. 왜 마스크 쓰라는 언급은 없나
무엇보다 트럼프가 마스크를 쓰라는 언급을 않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마스크가 없기 때문입니다.
블룸버그는 어제(현지시간 2020년 3월 31일) 미국 의사들이 ‘해고 경고’를 받았다고 보도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20만 명을 넘어 창궐하는 이 중요한 시기에 부족한 의료진을 잘라야 하는 중대한 이유는 바로 “마스크 없다”는 증언이 병원 내부 방침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스탠포드 대학병원은 마스크 등을 기부 받기 위한 웹페이지까지 개설했습니다. 의료진이 사용할 기본적인 보호장구조차 부족한데 일반인들이 쓸 마스크 여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미국은 한국처럼 걸어서 접근 가능한 동네 약국도 없습니다. 쇼핑몰에 입점한 CVS, Walgreens 등 대형 약국들도 진통제는 선반마다 그득그득 쌓여있지만, 마스크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발하기 전에도 갖춰놓은 데가 별로 없었습니다. 2년 전, 나파밸리 대형 산불로 1시간 떨어진 오클랜드까지 자욱한 재에 뒤덮여 외출 자제를 당부하던 당시에도, 마스크 수요가 있었을 텐데 다운타운 대형 약국조차 10개들이 마스크 박스 2-3개가 겨우 놓여있었습니다. 많이 들여오지 않냐는 질문에도 마스크 별로 안 쓰니 재고도 없다는 대답뿐이었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 본인이 마스크를 쓰고 나오거나, 국민에게 마스크 쓰기를 권장한다면, 추가적인 사회 혼란은 불 보듯 뻔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이후 총기 판매가 급증하면서 수급이 달린다는 기사까지 나왔는데, 마스크 놓고 총질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재선을 노리는 트럼프를 약화시킬 테니, 미룰 수 있는 만큼 미뤄보자는 계산을 하고 있겠죠.
https://www.ktuu.com/content/news/Gun-sales-increase-dealers-face-ammo-shortages-during-the-COVID-19-outbreak-569238011.html
3. 자택 대피 명령 (Shelter-in-place)은 왜 길어졌나
어제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은 5월 1일까지였던 자택 대피 명령을 5월 3일까지로 재연장했습니다. (첫 조치때는 4월 7일까지) 술집이든 식당이든 영업에 제한을 두지 않은 한국과는 달리 이곳은 병원과 마켓 등 필수영역으로 지정된 곳과 배달 음식점 외에는 문을 닫도록 조치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마스크 문제 외에도 이유는 많습니다. 우선, 사생활을 중요시하다 보니 확진자 동선 파악이 힘듭니다. 인건비가 비싸고 땅이 넓어 우리나라처럼 공무원들이 달려들어 일일이 방역을 하기도 어렵습니다. 손 씻기와 소매 기침 등으로만 개개인의 위생을 담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아예 문을 닫게 하고 집에 있도록 한 겁니다. 여기에, 아시안들이 마스크를 써도, 안 써도 폭행당하거나 날계란을 맞는 등 중범죄로 여겨지는 인종차별 사건이 잇따른 것도 자택 대피의 추가 사유가 됐습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대형 병원선을 병상이 턱없이 부족한 뉴욕 맨해튼으로 급파했습니다. 국방비 천 조의 강대국다운 조치입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미국은 ‘강하고 큰 나라’이지만 아직 선진국이라 하기엔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선진국의 중요한 요건 중 하나가 ‘국가 인프라가 국민 개개인에 잘 닿느냐’ 여부입니다. 사회보장이 국가적으로 잘 이루어진 북유럽 여러 나라가 선진국으로 꼽히는 이유지요. 어려운 수술에 잇따라 성공하는 등 의료기술은 세계 최고로 알려진 미국이지만,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의료보험과 진단 등 의료 체계가 얼마나 취약한지 드러났습니다. 소비의 천국으로 알려진 미국이지만, 필수 소비재 유통과 공급이 안정적이지 못해 휴지와 위생용품은 아직도 품절입니다. 반면, 한국은 동네 약국을 통해 마스크가 매주 2개씩 안정적으로 공급되고, 가까운 보건소에 전화하면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유통망은 골목골목 거미줄처럼 뻗어있습니다. 인프라가 안정적이면 사람들은 불안감을 갖지 않습니다. 사재기도 없겠죠. 선진 시민 의식은 이처럼 인프라 구축 여부가 큰 영향을 미칩니다.
아... 정겨운 동네 약국, 동네 슈퍼, 편의점을 걸어갈 수 있는 선진국 한국이 유난히 그리운 날입니다.
p.s. 코로나 바이러스로 고통을 겪고 있는 미국내 한인 커뮤니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각종 정보가 한 곳에 모여있는 웹사이트를 첨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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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acfsf.org/coronavirus-resour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