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당신의 선택은? “Any Functioning Adult!”
2020 총선 투표 무사히 하셨나요? 원하는 후보가 당선됐나요? 부럽습니다.
저는 안타깝게도 한 표 행사를 못했습니다. 일찌감치 재외 선거를 신청했지만, 사전 투표일을 이틀 앞두고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취소됐기 때문입니다. 투표소였던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에서는 개인 메일을 통해 방역 조치 상황을 보내주고, 한꺼번에 투표인이 몰리지 않도록 준비했습니다만, 미국 정부가 태클을 걸었습니다. 재외선거 실시에 대한 우려를 우리 정부에 공식적으로 표명한 것이죠. 캐나다, 뉴질랜드, 말레이시아, 인도, 필리핀, 브라질, 파라과이, 아랍에미리트, 요르단에서도 재외선거가 중지되긴 했지만, 민주주의의 첨병인 아메리카가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를 못하게 하다니요! 해외 유권자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미국 교민 4만 명의 투표권이 졸지에 사라졌습니다. 이 나라의 미천한 의료체계와 재외국민의 건강을 고려해 선거를 취소한 우리 정부의 결정을 존중합니다만, 미국이 제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불쾌함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투표 왜 막았나 - ‘마스크, 테스트 킷 다 부족한데... 묻지 말고 그냥 나가지마!’
미국 입장에서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자국민도 아닌 가뜩이나 트럼프가 싫어하는 외국인이 자기 나라 선거하겠다고 모이는 상황을 우려할 만도 합니다. 미국은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대처를 가장 못한 나라로 손꼽힙니다. 자택 대피 명령에도 바이러스가 급속 확산되자 , 뒤늦게 마스크 없으니 스카프라도 쓰라고 입장을 번복한 데 이어,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갈 마스크를 가로채는 ‘해적질’로 욕을 얻어먹습니다.
WHO 표준 검사 방법을 이용하여 신속하게 검사를 시작한 한국과 달리, 미국은 이 방법을 거부하고, CDC에서 독자적인 방법을 개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CDC가 보낸 키트는 오류투성이로 드러나 결국 회수하게 됩니다. 자국민 목숨이 오락가락하는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다른 나라 진단 키트는 못 믿겠다며 버티다 지난달 24일에야 우리나라에 진단키트를 요청했고, 부랴부랴 FDA 사전 승인을 내서 드디어 어제 미국 본토에 도착했습니다. 방역/의료 시스템이 개선되기는커녕, 테스트받기는 여전히 까다롭기 그지없습니다. 이런 총체적인 난국은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 60만 명 돌파, 사망자 2만 5천 명으로 귀결됐습니다. (4월 15일 기준)
수세에 몰린 트럼프의 출구전략 ‘WHO에 책임전가’... 효과는 ‘글쎄’
수치는 모든 것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질병 확산 초기, 독감으로 인해 더 많이 죽는다며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염력을 간과한 데 이어, 수많은 시행착오를 냈습니다. 반복된 오판이 희생자 규모를 더 키웠다는 책임론이 대두되자 대선 지지율도 떨어졌습니다. 특히, 코로나 바이러스와 직결된 보건 부분 지지율에서는 민주당 바이든 후보에 크게 뒤쳐졌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대선 캠페인도 못 다니고, 자신의 치적으로 내세웠던 경제마저 침체되면서 위기에 처한 트럼프 대통령은 특기를 시전 합니다. 바로 ‘책임 전가’이죠. 이번 희생양은 세계 보건기구 WHO입니다. 중국 편에 서서 가짜 정보를 흘려 미국에 큰 피해를 야기했다는 이유로 기금 지원을 끊겠다고 협박해, 전 세계를 발칵 뒤집었습니다. 자신의 주요 지지층을 결집시켰던 두 가지 방법인 중국 때리기와 국제기구 무용론을 한 번에 쓴 겁니다. 지금까지 상당히 잘 먹혀들었던 이 두 가지 전략이 이번에도 먹힐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제가 보기엔 자충수를 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미국이 탈퇴하거나 무용론을 제기한 국제기구는 유네스코, 유엔인권위원회, 세계 무역기구 WTO 등으로 사실 일반인들이 체감할만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WHO 역시 의료분야가 취약한 제3세계에 주로 집중해왔기 때문에 우리의 주요 관심 밖에 있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확인됐습니다. 미국의 영향력이 약해진 사이 WHO는 중국 자본에 휘둘린 정황을 곳곳에서 보였습니다. 스페인 독감, 사스, 메르스 등 과거 세계적으로 유행한 치명적인 전염병들이 발병 지역에 기반해 명명됐지만, 유독 코로나 바이러스 COVID-19만은 중국, 우한 등의 지역명이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팬데믹 선언도 늦었습니다. 이처럼 국제기구 내에서 힘의 균형이 무너진 이후, 미국 수장의 오판마저 계속됐습니다. 전염력이 최강인 이 역병이 제때, 제대로 대처되지 못하면서 발생지역의 태평양 건너 보통 사람들도 모두 영향권에 놓였습니다. 집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일자리를 잃거나 월급이 깎이는 건 물론, 내 주변 사람들의 목숨까지 위태롭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 행동 양식을 모두 바꿔놓았고, 체감 공포는 더욱 커졌습니다. 보건 분야 지원에 주력하던 빌 게이츠 역시 “전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WHO가 필요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전 세계는 중국에 쏠리지 않은 균형 잡힌 WHO가 필요합니다. 잠시 미국이 한눈 판 사이에 상황이 이 지경이 됐는데, 돈줄마저 끊으면 어떻게 될까요?
“한국처럼 미국도 선거 잘해보자”..... 제발요, 제대로 된 어른을 뽑아주세요!
트럼프 대통령의 의사 결정 과정이 이성적, 상식적이지 않은 점을 경험한 많은 미국인들, 특히 민주당 색채가 강한 캘리포니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는 11월 대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택 대피 명령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미국 언론들은 예정대로 대선을 치를 수 있을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트럼프 정부의 팬데믹 대처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반증이겠죠. 미국에 살게 된 입장에서, 어떻게든 상황이 나아져서 대선도 정상적으로 치러지고 이 나라가 살기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하지만, 저는 미국에서 선거권이 없습니다. 그저 여기 사람들이 누가 됐든 제정신 박힌 어른 “Any Functioning Adult”을 뽑아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입장이지요. 대통령이 무심코 내던진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이 나라 사람들도 깨달았을 겁니다. 리더가 미덥지 못한 미국 사람들은 이제 한국 소식에 귀를 기울입니다.
한국 확진자 수가 얼마나 줄었는지, 어떻게 줄였는지를 날마다 전합니다. 그리고 4월 15일, 팬데믹이 무색할 정도로 차분하게, 이성적이고 위생적인 선거를 치를 수 있다는 점을 전 세계 첫 번째 사례인 한국을 통해 알게 됐습니다. 모쪼록 미국이 우리나라 사례를 잘 배워서 11월 대선 잘 치러내길 바랍니다. 그래야 졸지에 선거권을 빼앗긴 제 억울함을 반 분이나마 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p.s.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 얘기가 나온 김에 총영사관에서 운영하는 오픈 채팅방 공유합니다. 코로나 19와 관련해 우리 교민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미국 정부의 조치와 주의사항 등을 실시간으로 전달해줍니다. 미국이 19세기 방식으로 코로나 주의사항을 우편으로 보내는 동안 우리 정부는 21세기 IT시대에 걸맞게 카톡으로 교민들과 직접 접촉하고 있습니다. 아... 우리나라 선진국입니다... 국민 여러분들이 행사한 한 표가 결국 이렇게 귀결된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