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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Beluga 고래아가씨 Apr 19. 2020

언니, 저는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미국이민 백 일만에 역이민을 결정한 현명한 후배에게


존경하는 후배가 있습니다. 스무 살 신입생 때부터 우아함과 이지적인 면모로 한눈에 띄었습니다. 주요 언론사 기자일 때는 당대표, 대선 주자를 전담 마크할 만큼 인정받았고, 두 아들 육아와 기자일을 병행하기 불가능한 상황이 되면서 작가로 전업했습니다. 똑 부러지는 그녀는 역시 전업 후에도 잘 나갑니다. 왕성하게 강연도 다니는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었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미국행을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잠시 연수 오나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한국에 은행/증권계좌까지 싹 다 없앴다는 걸 보니 삶의 터전을 바꾸려는 의지가 엿보였습니다.      

그녀가 미국에 온다니 기뻤습니다.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는 한국 친구들의 경우, 시차의 벽이 생각보다 높습니다. 미국에서 사귄 친구들은 공유하는 감정의 결이 다릅니다. 선택한 지역이 비록 제가 사는 캘리포니아가 아닐지라도, 비슷한 시간대에 머문다는 사실이 위안이 됐습니다. 서울에 있을 때 자주 연락한 건 아니지만, 20년 전 한 공간에서 동시대의 경험과 지인을 공유했다는 점은 격조했던 세월을 뛰어넘을 충분조건이 됩니다. 무엇보다 미국 이민 생활을 공유하는 동료가 생겼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기다렸던 그녀가 2020년 새해,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런데, 석 달 여 만에 그녀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처음부터 꼬이네요”  


한 치 앞을 못 보는 게 사람 일이라죠. 그녀가 미국으로 건너온 지 일주일 만에 한국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첫 확진자가 나타났습니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미국에도 첫 확진자 발생이 확인됐지만,  큰 땅덩어리에 일부 대도시 제외하고는 인구 밀도가 낮아 한국과는 다를 거라는 안일한 생각이 팽배했습니다. 저를 비롯한 많은 교민들은 고국의 가족 친지를 걱정하는 마음 한편으로는, 태평양 너머에 있어 약간은 안도하는 미안함도 있었습니다.

편견과 죄책감 어린 안심은 한 달여밖에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한국이 혼돈과 공포의 2월을 보내고 3월부터 안정을 되찾아간 반면, 미국에서는 자고 일어나면 확진자가 몇 만 명씩 늡니다. 마스크, 손세정제, 휴지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우리를 걱정해 주기 시작합니다. 학교가 문을 닫고 온라인 수업을 하니, 유학생들은 비싼 생활비를 감당하며 여기서 갇혀 지낼 이유가 없습니다. 재택근무를 하게 된 직장인들도 마찬가지, 테스트를 받기 힘든 미국이 더 위험하다는 생각에 많은 교민들이 한국행을 결정했습니다. 가까이 지내는 한 역기러기 아빠는 가족을 미국에 데려오려다, 자신이 한국으로 건너가기로 계획을 바꿨습니다.



“엄마이다 보니 제 개인의 삶에 대해서는 조금씩 욕심을 놓게 돼요.”


아이가 있는 가정은 더 많이 고민합니다. 미국행을 결정하는 주요 항목이 바로 자녀 교육인데 가을학기가 열릴지 미지수, 열린다고 해도 앞으로 4-5개월을 집에서만 보내야만 한다면 교육 공백은 불가피하고 부모들의 부담은 한층 더 커집니다. 한국은 빠르게 정상화되고 있는 데다 서로 기댈 친정, 시가가 있으니 백 번 낫죠. 다행히 아이들이 어리다는 점은 역이민에서 가장 큰 장점입니다. 다시 돌아가고 싶어도 아이들이 받을 충격 때문에 망설이는 경우 참 많습니다. 가족 모두가 더 행복해지려고 이민/역이민을 결정하는데 누군가의 희생이, 그 누군가가 아이들일 경우, 부모들의 자괴감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가족의 미래가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https://www.missycoupons.com/zero/board.php#id=general&ss=on&sn=&sc=on&keyword=귀국&no=134105

<역이민 고민하시는 분들, 위 링크에 선배님들 글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엔트리로 다시 시작하기엔 무리인 것 같아요.”


풋풋했던 그녀도 어느덧 마흔, 세상 알만큼 알 나이임에도 100일간의 미국 생활은 세상의 모든 걸 처음 경험하는 신생아가 된 듯한 기분이었답니다.  예전처럼 불안하지는 않지만, 한국에서와는 달리 사회에서 역할이 없어지고 현실을 좀 알게 되니 살짝 우울하기도 했다면서, 제게 현지 언론사 일자리 알아보지 않았냐 물어봅니다.


“아니, 꿈도 안 꿔.”  
“한국서 기자 할 때 보면 대부분 글쓰기나 말하기 능력이 월등한 사람들이잖아. 그래서 영어를 갖고 놀 수준이 아니면 현지 언론사 취업은 힘들어. 동네 신문 스트레이트 기사야 읽고 쓰는 정도 하겠지만, 당장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같은 메인 언론사 기사는 문장 구조도 복잡하고 쓰인 단어 수준도 달라서 읽는 것조차 벅차더라. 그래서 미국 언론사 지원은 애초에 접었지.”


후배도 수긍하는 듯 결국 한국과 연결된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한답니다. 하지만, 전문직인 남편은 리더 역할을 했는데, 미국에선 엔트리 레벨부터 다시 시작해야 된다는 부담이 예상보다 훨씬 컸던 모양입니다. 남편은 그간 일을 그만두지 않았고, 후배 역시 원래 하던 일을 다시 맡을 수 있어 다행히 제자리로 돌아가기에 문제가 없답니다. 역시 그녀는 현명하고 똑똑합니다.

후배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소식을 전하며, 몇 년 전 모든 것을 정리하고 유학 갔다가 반년만에 한국으로 귀국한 지인의 입장을 지금에야 이해하게 됐답니다. 추측컨대, 막상 미국에 와보니 한국이 별천지였다는 생각을 분명히 했을 겁니다. ‘재미있는 지옥’이라고 놀림받던 한국이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안전지대’이자, ‘천국’으로 거듭났습니다. 여기는 동네 사람들 모두가 재택근무를 하니 인터넷 연결은 수시로 느려지고, 심지어 끊기기도 합니다. 회원비 내는 아마존 프라임 조차 배송은 함흥차사입니다.  동부는 4월 중순인 오늘 눈까지 내립니다. 미국이 한국보다 싸고 좋은 건, 공기와 고기, 휘발유, 꽃뿐인 것 같습니다.

그녀를 전보다 더 존경하게 된 이유는 매몰비용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시간이 자기 부부에게 지난 인생을 찬찬히 되짚고, 앞으로의 삶을 새로 그리는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역사에 남을 전 지구적 재난 아래, 떨어져 지내며 가족 간 유대감이 끈끈해진 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역시 그녀는 크게, 멀리 볼 줄 압니다. 그녀의 안전한 귀국을 기원하며, 한국에서의 새로운 행보를 기대합니다.  
  

“언니는 한국 안 가요?”


미국은 확진자 69만 명, 사망자 3만 5천 명을 넘었습니다.(4월 18일 기준)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은 어제 자정부터 마스크 안 쓰고 나다니면 천 달러 벌금을 물어야 합니다. 그래도 한국에 못 갑니다. 이곳에 정착하느라 이젠 서울에 집도 직장도 없습니다. 미국집이 우리 집입니다. 엄마 집엔 길냥이들이 제 공간을 점령한 지 오래입니다.

저는 이제 죽어도 미국 귀신입니다.

후배야,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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