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는 많지만, 제 자리는 없네요” (미국의 한국여자...4편)
아이가 없어 자유롭고, 미국에서 잘 적응하고 있다 하더라도 잘 알려진 구직 게시판을 보면 막상 지원하고 싶은 곳, 지원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습니다. 아쉬워하며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는 이 시간에도 다른 한인 이주 여성 누군가는 실물 경제에 참여해 돈을 벌고 있을 겁니다. 내가 하려던 바로 그 일, 그 사람은 어떻게 찾았을까요? 그리고 ‘문과라서 죄송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얻은 사람들은 어떤 경로를 취했을까요?
1. 한인 게시판 - “숨은 조건들을 잘 알아보세요”
베이 지역 대표적인 한인 사회 게시판들을 둘러보면 주로 내니, 식당 서버, 조리사를 구합니다. 이쪽 경력이나 기술이 있거나, 향후 자영업을 하실 예정이라면 도움이 되겠지만, 한국서 직장생활 하다 온 사람들, 특히 30대들은 별 관심이 없죠. 그런 공고들 사이에 가뭄에 콩 나듯 코트라, 혁신센터 같은 정부 산하기관에서 구직 공고가 뜨는데, 문과 출신도 혹할 만한 마케팅, 인큐베이팅, 현지 기업 인턴 선발/알선 지원 등의 자리가 있습니다. 대부분 약 1년 단위의 풀타임 계약직을 원합니다. 과거 이들 중 한 곳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30대 초반의 S 씨는 정부 관련 기관 일자리를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정해진 출퇴근 시간과 꽉 짜인 일정, 답답한 조직문화, 임금에 비해 일거리는 많아 일과 생활의 균형을 잡기가 힘들었다고 말합니다. 미국 속의 한국인 거죠. 그래도 정부기관이니 경력으로서는 훌륭합니다. 이 곳을 발판으로 현지 업체로 이직에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조건이 된다면 지원해 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한국에서 하던 기자일을 이어서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구직게시판에서 본 한 지역 한인 방송에 이력서를 넣어봤습니다. 경력이 있으니 당장 연락을 받긴 했습니다만, 피차간에 조건이 맞지 않았습니다. 근무시간은 오전 6시부터 정오까지, 방송 준비와 당시 살던 집과의 거리를 감안하면 새벽 3시 반, 4시에는 나서야 하고 임금은 월 $3000로 최저 수준이었습니다. 그쪽에선 집이 너무 멀어 되겠냐고 부담스러워했습니다. 저는 같은 임금이라면 새벽이나 야간 근무, 스트레스가 가중되는 일은 하지 않는 게 미국에서는 돈 버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의료보험이 적용된다 하더라도 병원비며 약값이 너무 비싸기 때문에 몸이 축나는 일은 안 하는 게 나은 거죠.
2. 인맥 - “미국 사회는 뭐니 뭐니 해도 머니,
그다음이 인맥”
이후 한인 봉사단체의 프로그램 매니저 일자리에도 지원했는데, 연락 못 받았습니다. 한 행사에 갔는데 해당 단체가 부스를 차려놓고 있길래 관계자에게 직접 물어봤더니, “Overqualified”라서 안 뽑았다고, 진실은 아닐지언정 아주 예의 바른 방법으로 탈락 사유를 알려주셨습니다. 이후에 지역 사회단체에 관여하고 기부도 많이 하는 분을 만나게 돼 안부를 나누다가 이 경험담을 말씀드렸더니 “내가 그쪽에다 좀 말해줄 걸” 하십니다. 깨달았습니다. ‘아, 네트워킹이 문제였구나!’ 한국 같았으면 ‘낙하산’이라고 눈총 받고 왕따 당했겠지만, 미국 사회는 인맥이 우선입니다. 당차게 지원했다가 대차게 떨어진 넷플릭스의 ‘시놉시스 에디팅(한국어-영어 이중언어구사자)’ 업무 역시, 제가 넷플릭스의 누군가를 알았어야, 그 사람이 담당자에게 언질을 줬어야, 이력서를 훑어보기라도 했을 거라는 얘기입니다. 미국에선 인맥 얻으려 좋은 대학 가고, 그 좋은 대학 안에서도 더 좋은 인맥 얻으려 이름난 클럽을 들어가려 경쟁하고, 수억 돈 들여 MBA까지 가는데 한국식 공채 시스템에 익숙했던 저는 어리숙하고 순진하게도 그 과정 모두 생략하고 공짜로(?) 취업 기회를 얻으려 했던 겁니다.
3. 경력 변경 - “다시 태어나세요”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스탠퍼드/UC버클리 출신이 넘쳐나는 실리콘밸리에서 한국에서 온, 그것도 비 이공계열이 일자리를 얻으려면,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예술을 전공했지만 웹프로그래밍을 배워서 경력 변경한 사례, 6개월에서 1년 정도 Python(코딩 언어)를 배운 뒤, 업체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관련 일을 익히고 경력 변경에 성공한 사례도 있습니다. 이처럼 비컴퓨터 전공자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다시 태어나면 시급은 $20에서 $40으로 두 배는 올릴 수 있게 됩니다. 현재 가진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한편, 자원봉사 등 재능 기부를 통한 경력과 인맥 쌓기 등이 모두 수반되어야 좀 더 큰돈을 만질 수 있다는 거죠. 이런 분들은 아직 많지 않아서, 강연 행사의 연사로 나올 정도이니, 대부분의 ‘문송’들로서는 멀고도 먼 존재들입니다. 그래도 한계를 깨보고 싶은 분들도 계시겠죠? 아래 링크로 가셔서 장학금 받고 무료로 경력 변경할 수 있는 기회에 도전해 보시는 것도 방법입니다.
4. 1-3번 다 안 내켜요 - “비영리단체를 찾아보세요”
한국에는 각 시군구별 이주여성센터에서 언어, 직업 교육을 합니다. 미국에서는 딱히 그런 게 없죠. 각자도생, 알아서 해야 됩니다. 그런데 베이 지역에는 한인 이주여성들의 재취업을 도와주는 비영리단체 <심플 스텝스>가 있습니다. 한인 게시판에 오르지 않는 비교적 괜찮은 일자리들이 이 곳에서 공지됩니다. 스타트업 오피스 매니저, 리서처 같은 전공분야가 필요 없고, 재택근무가 가능한 파트타임 등 다양하게 소개됩니다. 레이다를 열어놓고 있는 발 빠른 지원자들 때문에 자리는 금세 채워집니다. 경쟁은 어느 정도 해야 하지만, 적어도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겐 엄청난 지원군, 공짜 특혜가 있는 겁니다.
https://www.simplestepscc.org/
첫 번째로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게
네트워크가 없다는 것,
두 번째는 한국에서 아무리 좋은
경력과 학력이 있어도
미국에서 그대로 인정받기 어렵다는 것,
세 번째는 언어적인 장벽인 것 같아요...
이게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구나,
커뮤니티가 필요하구나 알게 됐어요
앞서 언급한 네 가지를 비롯해 이전 글에서 다룬 모든 수단과 방법들이 우리 한인 이주여성들의 디딤돌이 되어줄 수는 있겠지만, 첫 시작은 결국 ‘마음먹기’에 달려있습니다.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자신감은 아래로만 향합니다. 중력의 법칙은 마음과 생각에도 예외가 아니니까요. 게다가 한국 사람들 특유의 겸손함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실제 가진 능력보다 자신을 낮게 평가합니다. 단순히 개인의 자존감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받아온 경쟁적인 교육 체제가 스스로에게 더욱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게 만든 겁니다. 한국을 떠나왔으니, 그런 쓸데없는 겸손함은 함께 떠나보냅시다. 그리고....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