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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un흔 Jan 03. 2022

15.  암경험자, 신입 1년 차 리뷰

흔흔한 암경험자가 되기 위한 지침서.

암도 무찔렀으니 뭔들 못하랴.

다 덤벼! 드루와드루와!


자, 이 자신감이 바로 일 년간 브런치와 멀어지게 된 서막이다.


왜?

흔흔한 아만자라는 타이틀을 걸었던 만큼 앞으로의 내 삶은 "항상" 매우 기쁘고 만족스러워야 했다.

나는 그 누구보다 씩씩하게 암과 마주한 사람이었으니까.


작년 한 해 나의 모습은 대체로 씩씩하고 밝았다. 큰 일 앞에서는 되려 당당해지고 의연해지는 것이 나라는 사람의 특징이다. 반면에 치료가 끝남과 동시에 허탈함도 몰려왔고, 아직도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공허한 것은 여전하다.

몇몇 지인은 나의 이런 모습이 "애쓰는" 것 같아 보인다고 했었다.


'무슨 소리. 나는 지금 정말 아무렇지 않고 괜찮은데! 이렇게 당당한 내가 좋은 걸'


그때는 미처 몰랐다. 이별 후에 오는 후폭풍이란 것이 암 치료 후에도 찾아올 줄은..

아만자 타이틀을 갓 떼어낸 햇병아리 암경험자는 예상치 못한 감정들과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받아들여라. 이전과 다르다는 것을.


이제 막 아만자 타이틀을 벗었다면 첫 번째로 기억해야 할 암경험자의 지침이다.


다양한 활동과 잇따른 행운으로 자존감은 높아질 데로 높아졌고, 나를 사랑하는 마음도 만렙을 찍었더랬다.

항암을 마치고 나니 컨디션도 서서히 회복하기 시작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니 자연스럽게 아만자였다는 사실도 허구였던 것처럼 잊혀갔다.


꿈에서 깬 것 같았다.

다시 사회로 복귀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아직 회복되지 않은 체력으로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명 의미 있는 1년이었지만 잃어버린 시간이라는 생각은 떨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온전한 휴식은 사치라고 여겨졌다. 의욕이 앞섰고 그동안 힘들다 여기고 덮어놓았던 것들을 몰아서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다시 경주마 본능은 발동하게 된다.


컨디션?? 항상 좋아!!!!!!!!! 달려라 달려!!!!!!!!


2021년 1월, 새해가 되고 바빠진 회사일에 더 이상 자리를 비우는 것이 민망하여 바로 복직을 했다. 방사선 치료를 마친 지 두 달 정도 된 시점이었다. 앞서는 의지와 다르게 아주 살짝만이라도 무리하게 되면, 아니 무리를 하지 않아도..

몸은 '제발 좀 쉬어주세요'라고 신호를 보냈다.

급기야 알 수 없는 급성위장염으로 또다시 열흘 넘게 입원을 해야 했고, 온전치 못한 건강상태를 원망하게 됐다.


결국 회사도, 지인들에게도..그 누구보다 나에게도 건강 적신호가 민폐인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매일, 매주, 매달.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웠고, 치료가 끝났음에도 온전해지지 않는 건강상태가 여전히 낯설었다.


치료가 끝남과 동시에 한두 달 안에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거라 크게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반기가 되어서야 하나씩 내려놓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항암약 부작용으로 왔던 붓기가 8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고부터 서서히 빠지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회복하더라도 이전과는 같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난 후부터 였다.





참으면 또 병 된다. 배려하면 똥 된다.


암경험자가 사회에 다시 복귀했을 때 기억해야 할 지침 두 번째, 결국은 나 자신 먼저다.


멈춰있던 내 시간에서 빠져나와 현실사회의 시간과 부딪혔을 때 갖은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직장 생활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연차와 반차는 노동자에게 당연한 권리임에도 눈치게임이라는 것을..

 눈치 주는 사람이 없어도 한 달에 한 번씩 정기검진을 받기 위해 병원을 가야만 하는 암 경험자의 일정은 왠지 모르게 죄송스럽다. 그 죄송스러움으로 아닌데 싶은 것들도 웃으며 괜찮다 하며 넘기고 있었다.


 아만자의 공백이 회사 구성원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사안이기에 감내해야 할 문제라 여기고 스트레스를 외면했다. 항암 할 때의 당당한 모습은 어디 가고 점점 작아지는 건지…

참고 배려하다 얻은 것은 귀하게 다시 얻은 머리카락의 실종이었다.

외면했던 스트레스는 원형탈모라는 친구를 데리고 왔고, 이 친구는 괴로움을 주는 것들로부터 멀어지고 나서야 겨우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나는 안식년 아닌 안식년을 갖기로 했다.





암 경험자 훈장을 수여합니다.

 지난 일 년 간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스스로가 많이 위축되었다. 큰 일을 겪으면 주위의 공기도 바뀐다는 말이 있듯이 나를 둘러싼 많은 환경이 바뀌었던 것이다. 모든 바뀐 환경 중에 단연코 인간관계가 가장 어렵다.

 그 과정을 겪으며 막역한 사이가 아닌, 그저 그런 적당한 거리의 인간관계에서 “내가 아만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옆에 있는 사람은 소중해"라는 이론을 만들어냈다.


전제가 굉장히 잘못된 이론이었다.

어느새,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만자였다는 사실을 마치 들춰내면 안 되는 치부처럼 여기고 있던 것이다.


꾸미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참 어려운 문제가 아닌가?

한때 건강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앞으로도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건강을 지켜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불현듯 엄습해오면 당당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다.

모두가 하는 위로가, 응원의 말들이 큰 힘이 되고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어느 때는 그 모든 것이 어린아이 어르고 달래는 사탕발림과도 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끊임없이 내면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기억하려고 한다.

아만자 타이틀을 졸업한 것은 암경험자 훈장을 따낸 것과 같다는 것을.. 전과범이 된 듯 숨기고 지낼 일이 아니란 것을.

남들은 얻지 못하는 삶의 의미를 분명 얻었으니 말이다.






맛있는 것 많이 먹고, 좋은 것 많이 보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 보내고..


2021년 크리스마스에도 딱 그랬다.

반짝반짝 온 세상이 빛나는 메리 크리스마스였으니까. 하루가 모자랄 만큼 바쁘게 지내다 보면, 작년 한 해는 허구처럼 느껴진다.


그러다 가끔 체해서 속이 안 좋은 날이면 그때의 그 메스꺼움이, 맛있던 음식의 역겨움이 울컥 올라와 기분이 영 좋지 않다.

그냥 남들과 다를 바 없이 체했을 뿐인데 강렬한 항암의 추억과 함께 그날들을 다시 기억해내곤 한다.


흔흔한 암경험자가 되기 위한 지침이라고는 했지만, 혹시라도 나와 같은 마음의 암경험자가 있다면 최소한의 우울감을 떨쳤으면 하는 마음에 가깝다.

게다가 꼭 즐겁게 이겨낼 필요는 없지 않나. 오늘까지 흘러왔듯, 물 흐르듯 살아가면 그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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