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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오래 Feb 21. 2020

직장에서 친하게 지낼 필요가 있나요?

일과 관계 사이에서


올해로 8년 차 직장인.

회사는 수배 이상 급성장했고 급하게 늘어난 인원만큼 조직은 어수선했다. 회사생활을 시작하며 누구나 바라는 목표가 있을 것이다. 돈, 승진, 여유 등 다양한 목표가 있겠지만 이 목표들에는 공통적인 필요조건이 있다.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될 것.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스무 명이 안 되는 듯한 작은 조직. 새로운 아이디어와 열정으로 이것저것 개선해보려 했다. 회사는 어딘가 고칠 것 투성이로 보였다. 몇 가지 개선안을 들고 찾아간 임원 분은 개선안을 내려놓고 이렇게 말하셨다.


일단 친하게 지내라


'이곳은 회사인데 왜?'라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친분 관계는 현재의 인맥이면 충분했다. 어떤 일을 해보라던지, 누구에게 무슨 일을 배워보라던지, 혹은 복사용지라도 좀 채워놓으라는 것도 아니라 친하게 지내는 걸 업무로 하라니.  


유통 상품 매니저(PM)가 되었다. (직업에 대해 한번 별도 작성할 생각이다. 이름처럼 IT업 프로덕트 매니저와 겹치는 면이 많다.) 외부 생산(OEM) 업체의 선정, 관리부터 내부 디자인, 품질관리, 마케팅까지 내외부의 프로젝트와 관련된 모든 인원과 협업하여 본인이 세운 기획을 실행하는 일이다.


성적이 괜찮았다. 꽤 많은 매출 증진을 이뤄냈고 일 잘한다는 칭찬을 들었다. 목표를 이룬 것 같았다. 그 해 익명 다면평가에서 내 피드백 페이지는 이러했다. 원문 그대로 옮겨본다.


업무시 공유가 안되며 타인과의 협력에 대해 원활하지 않습니다

알아서 잘 하는거 같아서 잘 모르겠다

때로는 주위도 돌아봤으면 좋겠음

팀과 동료에 대한 관심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너무 혼자 일하는 스타일

다양한 업무와 여러 사람과의 만남

교류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What..?


솔직히 기가 찼다. 교류가 없고, 혼자 일한다니. 하루에도 몇 시간씩 이 부서, 저 부서에 협조를 구해야 하고 임원까지 설득하는 게 일이었다. 협조와 설득에는 많은 감정과 에너지가 소모된다. 하루하루가 힘든 일이었다. 이직을 고민하고 있었다.


조직을 둘러보았다. 회사에는 다양한 조직원이 있다. 어떤 조직원은 특출 난 능력이 없는 듯하다. 하지만 늘 주변에 사람이 모여 있다. 때로는 특출 난 주변 사람들이 그의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기도 한다. 나 역시 그런 상사가 있었다. 몇 마디 위로 뒤에 이직을 포기했다. 이 때서야 나는 떠올렸다. '아, 이런 거구나.'


큰 기업에서는 결재 체계에 따라 감정 소모를 줄이고 효율적으로 일하려고 한다. 작은 기업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한 명이 이 부서, 저 부서 일을 넘나들며 해야 하는 일이 많다. 당연히 갈등이 생긴다. 모든 조직원과 합이 맞을 리도 없다.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을 주변에 둬라


업무의 유연성을 유지하면서도 감정의 소모를 줄이고 효율적으로 일해야 했다. 각 부문별로 나와 합이 맞는 인원 한 두 명씩에게는 친절 에너지를 조금 더 할애했다. 그들을 거점으로 부문 내에 인간 관계도를 들을 수 있었다. 협조와 설득이 어려운 일에는 주변 인물들부터 포섭했다.


교생실습에 나가면 이런 걸 배운다. '학급관계도'


에너지는 한정된 것이고 혼자 처리해야 했던 업무 에너지를 남들에게 친절 에너지로 조금 전환했다. (사이코패스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이과적 사고방식 때문이라 생각하자.) 으레 밀레니얼 세대가 그렇듯 나 역시 직장인의 페르소나 안에서 사적인 영역은 보존받길 원한다. 업무로써의 친절 에너지만 사용했을 뿐이다.


생각보다 효과는 대단했다.

일에는 품이 더 들고 관계를 맺어야할 대상은 늘었지만, 신뢰 관계가 구축되면서 감정 소모는 줄고 전체적인 일의 효율은 올라갔다. 업무에서 친절 에너지를 내는 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갈등 예상 시의 발화에는 반드시 "제 생각에는"으로 시작한다.

상대방 업무 분야의 기초는 익힌다. 어떤 업무가 어느정도 품이 드는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

엔드유저 관점에서 문제가 없으면 괜찮은 것이다. 양보가 가능한 부분인지 다시 한번 생각할 것.

0부터 시작하게 하지 말라. 이를테면 디자이너에게 텍스트 타이핑을 직접 하게 하지 말 것.

상대방 의견을 1%라도 반영한다.

상대방이 본인 Role로 생각하는 부분은 그를 통해서 완성되도록 한다. 내가 99%를 했을지라도.

때로는 내 입을 통해 말하지 않는 편이 좋을 때도 있다. 상급자나 주변 인물을 이용하라.

잡담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기념일에 카톡 메세지 한줄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이후 내 피드백 페이지는 이렇다. 역시 원문 그대로 옮겨본다. 


업무에 대한 전문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협업을 위해 타인을 존중하고 경청하는 자세를 칭찬합니다.

업무를 꼼꼼하고 효율적으로 해서 배울 점이 많습니다.

업무 통찰력, 업무 집중력, 디테일, 논리와 사실 배경 업무 진행

어떤일을 맡겨도 일정이상을 할것 같은 믿음이 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정신이 있으며, 본인 카테고리외 다른 프로젝트시에도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본인의 업무에 대한 책임감과 목표를 위해 끌고나가는 힘이 있습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정확한 분석을 통해 체계적으로 업무를 하는 부분은 프로페셔널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또 본인의 성장을 위해 꾸준히 자기계발을 하는 부분도 높이 사는 부분입니다.

동료의 긴급한 요청에도 늘 친절히 응대 하는 모습과 끊임없이 할일을 찾는 모습에서 진정한 영향력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약간 낯 부끄럽지만..


일이 먼저일까 관계가 먼저일까. 조직의 관점에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관계라는 것은 조직원들의 가교 역할을 한다. 조직원들을 조직에 붙잡고만 있더라도 그는 충분히 필요한 인재다.


더군다나 이 책을 읽어 보았다면..


일을 잘하는 사람이 늘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은 아니다.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은 반드시 일을 잘하는 사람이다. (그 자신은 아닐지라도)

조직에는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 늘 필요하다.




 신입사원이었던 내게 처음 '친하게 지내라'는 업무를 지시하신 임원은 현재 대표가 되셨다. 회사는 천억 대 규모로 성장했다. 나도 팀장이 되었다. 손해 볼 것 없는 업무 지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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