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은 법률구조공단에서 지원하는, 의뢰인에게는 무료인 사건이었다. 후배가 진행하다가 갑자기 공직에 취업하게 되어 나에게 넘어온 사건이었다.
사건을 맡았으니 상담을 해봐야겠다 싶어 사무실로 오시라고 했다.
정말, 얘기가 도무지 끝나지를 않는 사람이었다.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길고 긴 서론 과정을 거쳐 본론에 간신히 다다르는 스타일이었다. 재판에 필요한 부분은 본론인데, 본인이 말하는 모든 것이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예를 들어, "안녕하세요. 본인이 단군 할아버지시죠?" 라고 물었다고 치자. 그럼 그녀의 얘기는 "웅녀가 어떻게 인간이 됬냐면요. ...." 로 시작될 뿐 아니라, 내가 한참 듣다가 "아, 이제 그만 단군얘기로 넘어가시죠." 라고 하면 "왜 내 얘기를 안들어 주는거죠."라고 정색을 해서, 기어코 웅녀가 사람이 되는 긴 과정을 디테일하게 설명하고 단군을 낳은 얘기까지 꾸역 꾸역 듣게 만드는 그런 식의 대화를 하는 사람이었다. 길고긴 상담을 마쳤다.
이 사건은 남편이 제기한 이혼 소송 1심에서 의뢰인이 지고, 항소한 사건이었다. "이미 혼인이 파탄에 이르렀으니 이혼하라"라는 판결이 나왔지만, 이혼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항소를 한 것이다.
본인도 이혼은 하고 싶지만, 남편이 제기한 이혼소송으로 이혼을 하는 것은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사건은 이미 상당히 진행되어 거의 끝나가는 상황에서 내게 넘어왔고, 상대인 남편이 주장하는 서면을 제출하는 차례였는데, 남편이 재판을 계속 미뤘다.
그 사이 의뢰인은 나를 또 만나러 오겠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진행된 것이 없는데, 반드시 만나서 얘기하고 싶다는 것이다. 전화를 했다. 전화로 말 못하실 내용이냐고. 그랬더니 다시 구구절절한 화법으로 만나서 말을 해야하는 중요한 것이란다. 답답해진 나는 "주제만이라도 먼저 알려주시면 안될까요. 상담이후 재판이 진행된 것이 없는데요."라고 말했더니, 지금은 안 된단다. 뭐길래, 지금 전화로는 안되고 반드시 만나야 한다는 것인지, 이쯤되면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지금 말해달라고 실랑이를 벌였다.
"제가 중요하다면 중요한거고 만나서 들으면 되지 왜 그러세요"
"이틀 후면 재판인데, 만나서 얘기할 중요한 내용이 뭔지를 제가 알아야 재판에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그 전에 들어볼 필요가 없는 내용이면 재판과 관련없는 것 아닌가요"
이런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1시간을 넘게 통화했다.
지친 나는
"저는 친구나 심리상담사가 아닙니다. 불안해서 얘기할 상대가 필요하시면 다른 분께 얘기를 하시고, 재판과 관련된 문제만 제게 얘기하셨으면 합니다."
라고 했더니, 난리를 치는 것이다.
아니 변호사가 본인의 심리상태나 본인이 생각하는 사소한 것 까지도 다 들어주어야 한단 말인가?
법률구조사건이라 의뢰인은 무료로 하는 사건이었는데, 툭하면
"무료사건이라서 제가 드릴 말씀을 다 못드립니다."라는 것이다.
"아니요. 그 누구보다도 하고 싶은 말을 저한테 다 하고 계십니다.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라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전화를 한 번 하면 끊지 않을 뿐 아니라, 재판이 끝나면 길고 긴 대화를 나누고 내 앞에서 울었으며, 나와 전화를 하면서도 울고, 내 직원과 전화를 하면서도 울었다.
정말 이쯤되면 피곤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일이 힘든것이 아니라 의뢰인이 너무 힘들었다.
이런 와중에 갑자기 선고일을 앞두고, 상대가 소취하서를 제출하였다. 소취하에 우리가 동의만 하면, 이 모든 이혼소송이 없었던 일로 돌아가, 의뢰인이 그토록 원하는 "혼인상태" 가 유지될 것이었다. 의뢰인에게 전화를 걸어, 소취하 동의 의사를 물었다. 그저, "동의합니다." 이 한 마디면 나와 그녀는 이 사건을 끝내고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사건이 끝나기 전에 그녀가 "탄원서"라는 것을 제출하였었다. 나에게 말도 없이 본인이 제출한 것인데, 그 전에 내가 참고서면을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1주일 늦게 제출해서 남편이 이혼하겠다는 의사가 분명한 참고서면을 제출하였다며 화를 냈었다. 참고서면은 선고전에만 내면 되는 것이었고, 내가 제출한 참고서면의 내용은 "이혼소송 중에도 의뢰인이 매일 식사를 차려주고 추석에도 시댁에 함께 가는 등의 노력을 하고 있어, 실제로 결혼생활에 파탄에 이르렀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아주 간단한 내용이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내가 참고서면을 제출하지 않는 1주일새 본인의 상태가 많이 나빠져서 밥을 잘 못챙겨줬고, 그래서 그게 사실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라는 둥 뭔가 알 수 없는 내 탓을 했다. 긴긴 이혼소송 동안 계속 밥을 차려줬다고 본인이 주장을 해서 그렇게 써서 제출한 것이었다. 아마도 그 탄원서는 뭔가 재판부에 그런 사정을 적으면서 나를 비난하는 내용인 듯 했다. 굳이 본인이 탄원서를 쓴 배경 및 탄원서의 내용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알고 싶지도 않았고, 이 사건 소송을 마무리하는 마당에 알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말씀 안하셔도 된다고 동의여부만 알려달라고 했고, 이런 실랑이가 10분여간 벌어졌다. 결국 그녀는 소리소리를 지르며 막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황당했다.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그녀는 황당한 답변을 보내더니, 3시간 후인 한밤중에 갑자기 분이 안풀렸는지 황당무계한 긴긴 문자를 보내왔다. 소송은 끝났으니 더이상 연락하지 마시라고 문자를 보내고 차단후, 다음날 "소 취하에 대한 동의서"를 재판부에 내고 소송을 마무리지었다.
그 이후, 그녀는 "사임요구서(?-소송이 다 끝난 마당에 아무 소용도 없다)"라는 것을 재판부에 제출했다. 내가 본인을 만나주지도 않고 연락도 되지 않고, 아무것도 도와준 것이 없으며, 법에 있어 약자인 본인을 함부로 대했다면서 나를 사임시켜 달라는 것이다.
헛 웃음이 나왔다.
사람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것이 바로 이 경우구나 싶었다.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고 정상이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본인을 도와주는 상대에게 본인이 남편에 대해 가진 분노를 풀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온갖 도움을 다 받고 고맙다는 말 한마디는 커녕, 이렇게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막말을 하고 더 나아가 재판부에 있지도 않은 사실을 주장하다니. 너무 기가 막혔다.
처음에는 웃어넘겼다. '미쳤으니까 어쩔수 없다. '라는 심정이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스물스물 울분이 차서 명예훼손으로 고소장을 날릴까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조석으로 심경이 변하고 악몽까지 꾸다가 주말에 어떤 책을 읽고는 다 내려놓아야 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녀의 평가가 어떻든 간에, 난 할만큼 했고 스스로에게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세상에는 별의 별 사람이 다 있다. 그걸 이론적으로 알고는 있었으나, 이 일을 하면서 특히 무료 사건을 하면서는 몸소 느낄 일이 정말 많다.
이 사건을 마지막으로 법률구조 사건은 두번 다시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국가가, 충분히 먹고 살고 비용을 들여 소송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법률구조라는 시스템을 통해 선의를 가진 변호사들의 노동력을 값싸게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분마져 든다.
말 한마디가 천냥 빚을 갚는다고 했다. 정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