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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i aber Einsam Mar 15. 2021

만연히 길을 걷다가

그 교수님과의 첫 만남은 법학전문대학원에서 민법을 소개하는 첫 시간이었다.

특별히 첫 시간부터 열심히 수업을 들을 마음가짐은 가지고 있지 않았던 나는, 교수님께서 방대한 민법을 주욱~ 훑으시는 것을 한 귀로 들으면서 친구들과 오프라인 수다를 떨고 있었다.

'엄청나다. 민법을 저렇게 꿰뚫고 계시다니, 역시 교수님들은 다른건가.'라는 정도의 감탄을 하는 중이었는데

"그들은 만연히 길을 걷다가, 뚜껑이 열린 맨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라는 부분에 이르렀다.


"만연히 길을 걷다가"

너무 시적으로 들리는 것이 아닌가.


난 인문학을 전공했으므로, 엄밀히 법학 정규과정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딱딱한 법학에서 "만연히 길을 걷다."는 말을 들은 후, 고개를 들고 교수님의 강의를 제대로 듣게 되었다.

'만연히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떤것일까.'

느리고 자연스럽게?, 느릿하게? 여유있게? 민법이 너무 문학적으로 다가 왔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 "만연히"란 것은 법학적으로는 '부주의하게' 정도의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그런걸 알 리 없었던 그 날, 그 순간, 나는 문학적인 민법 교수님과 그 분의 강의에 푹 빠지게 되었다.


법대 교수님들은 내가 학부때 뵈었던 인문대 교수님들과는 많이 달랐다.

학부때는 아무때나 교수 연구실 문을 두드려는 것이 가능했고, 교수님은 수업시간에 수업을 하다 말고도, "자네는 머리를 왜 잘랐나. 4년 동안 긴머리였는데, 무슨 일이 있나." 와 같은 말씀을 하시는 다정하신 분들이었다.

하지만 대학원 첫 형법 시험에서 법대 시험지를 처음 써본 나는, 내 시험지의 수준이 궁금해서 교수연구실의 문을 두드렸을때,  "누가 약속도 없이 교수를 만나나. 그리고 본인의 시험지를 보면 본인이 뭘 아나?" 와 같은 엄숙한 한 말씀을 들은 후 교수 연구실 문앞에서 쫒겨나 약속을 다시 잡고 찾아뵈었어야 했다.  


올해 우여곡절 끝에 박사과정에 진학하게 되었다.

적응하기 어려웠던 엄청난 수강신청절차를 거쳐, 간신히 줌 강의에 들어갔더니, 소논문을 쓰거나 영어논문을 읽고 발표하거나, 이 두가지를 모두 해야하는 과목들을 잔뜩 듣게 되었다. 영어논문을 읽고 발표 하는 수업을 처음해보는 나는, 수업이 끝나고 "교수님, 논문이 50페이지나 되는 긴 것이던데, 제가 본 과목을 추가신청하여 남은 것이 그 논문밖에 없었습니다. 혼자 발표하는 것인가요?" 라고 여쭈어 보았다(어떤 논문은 두 사람씩 같이 발표하는 것이 있길래, 혹시나 해서 질문을 한 것이었다).

교수님은 몇 학기째 듣는거냐고, 본인은 수년간 가르치면서도 논문하나를 혼자 발표하는거 맞냐고 묻는 학생은 처음이라 "어안이 벙벙하다."면서 웃으셨고,  "제가 몰라서 너무 편하게 여쭈어 본 것 같습니다."라고 나도 웃으면서 답했으나, 둘 다 결단코 진심어린 웃음이 아니었다.


오랫만에 다시 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다시금, 그 뭐랄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서러움이 밀려온다.

'모를 수도 있는거지. 내가 다 알면 교수를 하지.' ,  '박사과정이면 더 고도의 지식전달 같은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 '난 법학을 하러 들어온건데, 영어번역을 열심히 해야하다니' , '뭘 안다고 내가 발표를 하지?' 등등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더 큰 문제는 그 아무도 이런 무지몽매한 질문은 하지 않기 때문에, 이 모든 서러움과 무식함은 오직 나만의 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입학을 한지 보름이 되었으나, 아직 학번을 외우지 못하고 있다.

공부를 하려고 마음을 먹다보면 지금 다니는 학교보다 훨씬 먼 곳에 위치한 대학원 도서관 떠오른다. 심리적으로 이 학교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일까?

오늘 해결되지 않는 서러운 마음으로 "만연히 길을 걷다가"  느닷없이 대학원의 그 민법교수님이 떠올랐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고 했다. 이 학교에서 중간이라도 잘 가서 무사히 과정을 마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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