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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서인간 Jan 21. 2024

쇼펜하우어의 뼈 때리는 경구들

생의 허무를 모르는 인간은, 생활에서 고독을 경험하지 못한 인간은 모두 길들여진 타인이다. 


현명할수록 명예와 체면이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안다. 


인간관계에서 돈은 진실을 확인하는 창이다. 


최고의 친구는 한없이 적에 가까운 친구다. 


산에 오르고 싶다면 남에게 떠밀려서도 안 되고, 자기 능력보다 무리해서도 안 된다. 정상을 바라보며 한눈팔지 말고 묵묵히 걸음을 옮겨야 한다. 너무나 평범한 방법이지만, 이것이 산을 무사히 정복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삶에 집착하는 자에게 죽음은 더 빨리 찾아오고, 죽음을 기다리는 자에게 삶은 더욱 긴 시간을 펼쳐놓는다. 


오래 산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이야깃거리가 있고, 추억이 있고, 놀랄만한 반전과 위험을 헤쳐온 생생한 목격담이 가득하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지겨움밖에 남는 게 없는 싸구려 동화책이다.


성실이 부족한 사람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더라도 그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다. 성실은 어떤 능력으로도 보완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자질이다. 


사교성은 지성과 반비례한다. 


규칙적이지 않은 위대한 생애는 없다. 


열광은 우울이라는 독초에서 발아된 독초이다. 


고통을 치르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기다림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내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도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잘못된 독서는 나쁜 친구와 어울리는 것보다 더 나쁘다. 


나의 육신이 휴식을 취할 때 나의 영혼은 생기를 얻는다. 


우리를 둘러싼 체계, 사회, 구조는 거미줄과 같다. 오직 거미줄을 쳐놓은 거미에게만 우호적이다. 거미줄을 쳐놓은 거미만이 거미줄 위에서 자유를 누린다. 


돈의 힘으로 행복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돈으로 산 행복에는 한계가 있다. 


인내를 그대의 의복으로 삼아라. 인내를 벗지 않는다면 수치를 당할 일도 없으리라. 


게을리 걸어도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착할 날이 오리라고 기대하지 말아라. 하루하루 전력을 다하지 않고는 그날의 보람은 없다. 보람 없는 날들의 반복으로 최후의 목표가 달성될 리 없다. 


절망은 희망보다 솔직하다. 그는 우리에게 한 번 준 것을 다시 빼앗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죽음을 떠올려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삶이 허락된 이유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난 자들이다.


고통과 쾌락은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두 마리 뱀의 형상이다. 한쪽의 고통으로 다른 한쪽의 고통이 시작되고, 고통이 더해질수록 서로의 꼬리를 무는 힘도 강해진다. 


불행과 고뇌에서 가장 빨리 위로받는 방법은 나보다 더 비참한 사람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어제의 행복으로 오늘을 만족하는 인간은 없다. 하지만 오늘의 재앙으로 당신의 내일은 행복해질 수 있다.


자녀를 나와 동등한 개인으로 인정해주지 않으면 자녀도 그에 대한 상호반응으로 부모를 개인으로 인정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자녀는 부모의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인식해 버린다. 


장수하는 것은 밤하늘에 떠 있는 작은 별이다. 그 별에 이름을 붙이는 자도 없고 특별히 기억하는 자도 없다.


논쟁이 시작되었을 때 사람들이 주로 선택하는 무기는 누군가의 권위다. 이런 자들과의 논쟁은 굉장히 소모적일 수밖에 없는데, 권위에 취한 자들을 깨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나약한 정신은 힘들게 자신의 이해와 통찰을 동원하기보다는 타인이 떨어뜨린 몇 마디 말을 잽싸게 주워 담아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몰래 삼킨 후 배설하기를 즐겨한다. 


행복은 어떤 목표를 향해 의지의 실천을 했을 때 길의 중간에서 우연찮게 얻은 물 한 모금 같은 것이다.


행복을 손에 넣고 싶다면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 되어서는 안 된다. 행복 이외의 다른 목표를 추구해야 한다.


인생은 불행해지기는 쉬워도 행복해지기는 어렵다. 


자신이 증오스러울 땐 자는 것이 최고다.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은 즐겁고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것이다. 


나는 노동을 사랑하고, 그 노동에 뒤따르는 고통을 사랑하고, 고통의 아픔을 사랑하고, 고통의 아픔이 전해주는 진실을 사랑한다. 


친절이 상대방의 감사로 만족한다면 우정은 친구의 행복으로 만족한다. 


우정은 두 사람 중 한 명이 보다 부유해졌을 때 금이 간다. 


사소한 일에 친구의 호의를 이용하는 것은 우정이 아니다. 진짜 위기가 닥쳤을 때를 대비해 친구의 호의를 소중이 간진해 두어라. 


인간은 서로 사랑할 수는 없지만, 아끼고 감싸줄 수는 있다.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려면 적어도 마흔 살은 되어야 한다. 


순결한 영혼 없이 순결한 글은 나오지 않는다. 


책은 막강한 힘을 가진 권력자다. 기독교의 신조차 성경이라는 책의 구조를 빌어 말씀을 보관하실 정도이다.


도시의 본질은 고된 삶을 외면하는 것이며,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의식적으로 조롱하고 경멸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간수는 채찍과 몽둥이를 들고 우리를 감시한다. 간수의 정체는 권태다. 권태는 언제나 우리 등 뒤에 서 있다. 


소유는 만족이 아니라 의무의 시작이다. 내가 뭔가를 가졌다는 것은 내게 어떤 의무가 주어졌다는 신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을 천국으로 만드는 방법이 하나 있다.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인생에 대한 극복과 인생에 대한 굴복이다. 숨 쉬는 모든 존재에게 길은 이 두 가지뿐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고집불통으로 변하는 까닭은 강제로 수용된 인식보다 개인의 야만적인 의지가 생의 욕구에 더욱 부합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생은 옷감과 같아서 처음에는 그 위에 수 놓인 무늬를 보고 가격을 흥정하지만, 막상 입고 다니다 보면 내 몸에 얼마나 잘 맞는지가 더 중요하다.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일수록 고통을 느끼는 감성이 극도로 예민하다. 그로 인해 작은 실수에도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나락에 떨어질 위험이 크다. 


한 번의 좌절이 하나의 정답으로 귀결되고 방황의 끝에서 남들에겐 없는 나만의 소양이 도출된다. 그렇게 능력과 소양을 채워나가다 보면 나의 타고난 품성과 경험된 지식과 한데 어우러져 세상이 바라보는 자의 진짜 모습이 구현되는 것이다. 


지배당하고 싶지 않다면 나를 지배하는 자와 똑같이 행동하면 된다.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소문이다. 나의 불행을 타인에게 이야기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따라 적과 동지를 구별하면 된다. 


역사 속에서 평화로운 날들은 자만했던 날들로 기록되고, 배불리 먹고 마셨던 시기는 사치와 향락으로 오욕되기 일쑤다. 


각각의 민족이 쌓아온 역사를 보면 전쟁과 반란 외에는 찾아볼 게 없다. 위로와 충고가 역사에 기록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적절한 충고를 해주고 교만해졌을 때 나를 혼내는 친구가 주변에 있다면 부모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받는 것과 비교할 만하다. 


흙으로 빵을 만들고 소꿉놀이를 하는 것과 글을 쓰고 연설을 하는 것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을 소유하면 비교당하거나 비교할 이유가 사라진다. 


노력해도 앞지르지 못할 것 같다면, 그래서 질투가 나고 괴롭다면 그들과 다른 길로 가는 게 상책이다. 


인생은 실수와 우연으로 덮여있다. 실수는 실패가 아니다. 실수의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실수 뒤엔 항상 우연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우연이 무슨 짓을 저질러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명백하게 저지른 실수에 대해 변명하거나 축소하거나 미화할 필요는 없다. 깨끗이 인정하고 징계를 받고 우연히 생긴 비극으로 인생의 페이지에 적어둔 뒤 책장을 덮어버리면 그만이다. 


논리는 단순해질수록 강력해지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할수록 죽음과 가까워진다. 죽음이 인간의 가장 행복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영웅은 화려한 빛과 같아서 그 빛으로는 우리의 밤을 따뜻하게 데워주지 못한다. 


풍파 없이 배가 항구에 닿을 수는 없다. 그래서 시련은 전진하는 자의 벗이다. 


젊은이들이여, 돈과 명예에 한 번뿐인 삶을 팔지 말아라. 돈과 명예는 부도덕한 자들과 동행하지 않는 한 그대들을 반기지 않는다. 


가진 자의 관심은 가진 것들을 향하고, 이름을 얻은 자의 관심은 그의 이름에만 갇혀버리게 된다. 


고뇌의 기쁨을 맛보지 못한 청춘은 청춘이 아니다.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니다. 


평안과 안식은 삶의 의지를 빼앗는 적이다. 당신의 삶이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되었을 때 당신의 삶은 사육자의 의지를 따르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라. 


의사, 간호사, 목사는 정상인이 아닌 심신이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직종이다. 정상 범주에서 이탈한 사람들을 보듬고 치유할 의무가 있지만, 오직 의료비와 헌금을 낼 능력이 되는 일부 계층을 상대하기 위한 사업확충에만 몰두하고 있다.


혼자 건강해서는 소용없다. 주위의 누군가가 불행과 고뇌라는 전염병을 보유하고 있다면 머잖아 근처의 모든 사람이 불행해진다. 


더불어 산다는 것이 꼭 모두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내 주위의 누군가가 고통받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회에 해악을 끼친 범죄자를 위한 교화시설과 그에 필요한 비용은 당연하다고 여기면서도, 장애인이나 고아 같은 선의의 구성원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감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회복하기 힘든 질병에 오염된 거대한 병원이다. 


계급과 부는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그가 지금 하는 일에 따라 존경과 멸시를 판단해야 한다. 


가진 자들의 머릿속에는 노동자들에게 많은 노동을 전가하는 계획밖에 들어있지 않다. 


인간의 수치는 할 일 없이 빈둥거리며 사람들 앞에서 거들먹거리는 저 뻔뻔스러운 부자들의 삶이다. 이보다 더 세상을 암울하게 만드는 폐단이 있는데 가난한 자들의 질투다. 부자를 비난하는 표정 뒤에서 자신보다 더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을 착취하려는 가난한 민중의 집단폭력은 공동체의 존립을 뒤흔드는 위협이 될 것이다.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성격과 성질이 있다. 성격은 타고난 것으로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고, 성질은 한평생 변해가는 유동적인 소질이다. 현재는 성격보다는 성질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데 둘 다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가난의 원석과도 같다. 이 돌 속에 어떤 보석이 숨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더 이상 원석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 돌을 깎고 다듬어 인생을 아름답게 꾸며볼 생각은 하지 않고 아무런 수고도 없이 타인이 깎아놓은 수고를 빼앗는 것만 계획하고 있다. 


자연이라는 우주의 어머니는 자신이 낳은 자녀들을 무수한 위험과 고난 앞에 방치한 채 방관만 하고 있다. 그들이 죽더라도 다시 자기 품으로 돌아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의 죽음은 자연에게는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는 회귀, 오랜  방황 끝에 집으로 돌아온 귀소일 뿐이다.


나뭇잎이 계절에 따라 순환하듯 우리도 살고 죽는 문제에 구애받지 말아야 한다. 인간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오직 이것뿐이다. 


과거 성현들은 하찮은 일에도 최선을 다했기에 큰일이 닥쳤을 때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었다. 반면 보통사람들은 하찮은 일을 안일하게 여겼다가 결과적으로 일생을 하찮게 보낸다. 


사람들이 나를 보지 않더라도 정직하게 행동할 것, 혼자 있어도 예의를 갖출 것, 듣는 사람이 없어도 거짓을 입에 담지 않을 것, 내 것이라고 생색내지 않고 몰래 나눠줄 것, 누군가 내게 실수를 저질렀어도 가르쳐주지 않을 것. 내가 나에게 부여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냈을 때, 나는 남보다 고상한 사람임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나의 자존심을 정당하게 만들어 줄 것이며 나는 자신감이 충만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나의 머리가 아닌 책을 쓴 자의 머리로 생각하겠다는 뜻이며, 학업은 누군가 걸어가며 좌절했던 절망을 희망 삼아 스스로를 속이는 행태임을 명심해야 한다. 


죽음의 공포가 철학의 근원이며, 종교는 우리의 죽음에서 시작된 잠시의 위로에 지나지 않는다. 


수만 권의 책을 읽은 자의 머릿속에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서식하고 있지만, 정작 그 자신은 그의 머릿속에 방 한 칸 마련되어 있지 않다.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은 군주와 같다. 그는 타인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자신의 성을 지켜내고, 독립된 지위를 누리고, 그에게 명령하는 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의 삶은 스스로 판단한다. 


인생은 수학 공식이 아니다. 인생은 시와 같은 예술이다. 직관의 세계에서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시가 탄생하듯 인생은 시작되는 법이다. 그렇지 못한 시간들은 죽음을 향해 끌려가는 도살장의 울부짖는 발걸음일 뿐이다.


인간이 아무리 애를 써도 삶은 기껏해야 두 종류뿐이다. 권태에 시달리든지, 고통에 시달리는 것이다. 권태도 반복되면 고통이 되고 잦은 고통도 시간이 지나면 무감각한 권태가 된다. 


청년 시절은 처지와 환경이 어떻든 대체로 불만스럽다. 세상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망상을 청년기에 뿌리 뽑을 수 있다면 다행이다. 


광기는 자기만의 확고한 의지를 가진 독립된 사람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독립하지 못한 의지, 즉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을 감염시킬 가능성이 많다. 


사람들이 집회에 참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의지는 자석과 비슷해서 보다 큰 의지에 작은 의지가 이끌린다. 의지가 허약한 사람일수록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두려움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두려움은 감기처럼 치유해야 할 질병이다. 감기에는 특별한 약이 없고 몸의 항체를 활성화시키는 것이 유일한 처방이다. 두려움을 치유하려면 나의 의지가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자기 몸이 견딜 수 있는 범위를 깨닫고 그 범위 안에서 유지하는 것이 진정한 인내다. 견뎌내지 못할 때까지 버티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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