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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기현 Jan 31. 2021

여성국극을 바라보는 3인의 관점

<정년이> 서이레, 나몬 / 네이버웹툰

BTS가 공연할 때마다 중계방송을 했고, 티켓 예매 오픈과 동시에 트래픽이 몰리면서 1분 만에 매진되었어요. 팬들의 꽃다발로 온통 무대가 묻힐 지경이었지요. 극성스러운 팬들은 가끔 혈서를 보내기도 하고… 그때 센터를 맡았던 멤버를 여학생들이 환장하게 좋아했습니다.     



가상의 인터뷰이지만 완전히 허구는 아니다. 1950년대 여성국극단의 스타 배우였던 김진진 여사의 인터뷰를 2020년에 맞게 각색한 것이다. ‘BTS’를 ‘여성국극단’으로 ‘티켓 예매 오픈’을 ‘매표소 줄 서는 것’으로, ‘센터를 맡았던 멤버’를 ‘왕자를 맡았던 배우’로 바꾸면 실제 신문 기사*1 그대로다. 당시 여성국극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여성국극은 1950년대 초반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 대중적으로 크게 인기를 누린, 창과 연기 그리고 무용을 결합한 한국식 종합 뮤지컬이다. 모든 배우가 여자로만 구성되어 여자가 남자 역할을 한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다.


<정년이>는 목포의 시골 소녀 윤정년이 부자가 되기 위해 매란국극단 연구생으로 입단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이 작품에서 눈여겨볼 지점은 등장인물들이 ‘여성국극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는가’이다. 국극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등장인물의 개성을 창조하고 각자 삶의 방향을 결정했다. 자, 이제 3인의 등장인물을 만날 시간이다.      


                 <정년이> ⓒ서이레, 나몬 / 네이버웹툰




국극 배우로 부자가 되고 싶어 - 윤정년


가난한 시골 소녀 ‘윤정년’의 인생 목표는 부자가 되는 것이다. 전쟁 중에 사라진 명창 채공선의 딸이라는 소위 ‘주인공 버프’ 덕분에 소리 하나는 타고났다. 국극 배우가 되면 돈을 가마니로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매란국극단에 입단한다. 그러나 가난한 연구생 생활이 계속되고, 최소한의 분장 도구라도 마련하기 위해 다방에서 일하다가 국극단에서 쫓겨난다. 돈을 많이 벌게 해주겠다는 방송국 PD의 제안으로 잠시 TV에 출연하는 가수가 되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국극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국극단으로 돌아온다.


“소리하고 싶습니다. 춤추고 싶습니다. 연기하고 싶습니다. 국극을 하고 싶습니다.”(41화) 


국극을 바라보는 윤정년의 관점이 바뀌는 순간이다. 윤정년은 국극을 ‘부자가 되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다. 그렇기에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수단이 나타나자 국극을 계속해야 할 이유를 잃어버렸다. 물론 국극을 부자가 되기 위한 수단으로 본 것을 꼭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국극을 대하는 진정성의 측면에서 조금 아쉬웠을 뿐이다. 윤정년은 자신이 되고 싶은 것을 국극에서 발견하고 이 과정에서 잃어버린 삶의 목표가 회복된다.  



난 최고가 되어 어머니에게 인정받을 거야 - 허영서


윤정년 만큼의 천부적인 재능은 아니지만, 유명한 성악가인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음악적 재능에 더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허영서’는 매란국극단의 에이스다. 어떤 배역을 맡든 최고가 되어야 하는 완벽주의자이다 보니 어떨 때는 다소 이기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윤정년. 공정하게 평가받아 보자고. 나와 너 둘 중 누가 더 왕자에 가까울까?(46화)"


완벽함을 추구하면서도 정정당당하게 승리하고자 하는 그녀를 어느 독자가 싫다고 하겠는가.   

그녀에게 있어 국극은 ‘어머니에게 인정받기 위한 수단’이다. 최고의 국극 배우가 되어 어머니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내면의 욕망이 그녀를 한발 더 나아가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성악을 하는 영서의 언니와 영서를 비교할 뿐만 아니라 국극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인정에 대한 결핍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을 수는 있지만, 과도한 경우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스스로 무너질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의 인정을 갈망한다. 하지만 타인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은 아니다.         



기생들이나 하는 국극, 잘하고 싶지 않아 - 백도앵


윤정년의 짝선배 ‘백도앵’은 국극단의 팔방미인이다. 서이레 작가는 실제 인물인 김경수 여사*2를 모델로 백도앵을 만들었다.*3 매란국극단 단장의 조카이며 사범학교 수석 졸업생이기도 한 그녀는 공연마다 남자 조연 역할을 도맡아 하고, 공연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탁월한 눈썰미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국극단의 행정도 챙기는 등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그런데 다재다능한 캐릭터에 어울리지 않게 소리실력은 부족하고 늘 조연에 머무른다.


백도앵은 양반이었던 아버지의 시각에서 국극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국극은 기생들이나 하는 저급한 것’으로 판단했고, 소리실력이 부족하지만 굳이 노력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문옥경의 경이로운 무대를 보며 감탄하는 내 안에도 너(문옥경)를 경멸하는 나의 아버지가 있어. 왕자를 허락하지 않은 건 그 누구도 아닌 나였구나.”(56화)


단장의 오해로 매란국극단에서 쫓겨나면서 백도앵은 국극에 관한 자신의 잘못된 관점을 자각한다. 그리고 관점의 변화는 마음가짐의 변화로 이어진다.


백도앵에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연기에 관한 탁월한 해석, 극단 전체를 보는 눈을 가진 그녀는 배우보다 오히려 연출가나 공연 기획자에 더 잘 어울린다. 그러나 이 역시도 그녀가 국극을 대하는 관점을 가지고 스스로 선택할 몫이다.     



색의 활용과 선의 활용


 <정년이>는 다른 웹툰에 비해 작화가 독특하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색의 활용’이다. 최근 웹툰의 시대물에서는 밝은 파란색을 잘 사용하지 않는데, <정년이>는 명도 높은 파란색과 황토색(구체적으로 주황색과 노란색 사이) 보색을 주로 사용했다. ‘파란색의 하늘과 치마’, ‘황토색의 건물과 책’의 대비는 독자가 그림을 편하게 감상하도록 도와준다. 명암의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여 배경을 평면으로 표현했고 그 결과 인물에게 주의가 더 집중되는 효과를 냈다.


또 다른 점은 ‘선의 활용’이다. 선의 두께가 일정하고, 선의 밀도가 높지 않기 때문에 탁 트인 느낌을 준다. 종종 ‘그림이 여름체 같이 시원하다’라는 댓글을 볼 수 있는 이유이다. 그 외에도 ‘머리 스타일’과 ‘복장’으로 등장인물의 개성을 표현했다. 연구생들이 대체로 단정한 머리에 획일적인 복장을 갖춘 반면, 옥경은 짧은 머리에 남자 복장, 혜랑은 세련된 현대식 복장, 단장은 짧은 머리에 날카로운 눈매, 보라색 입술 등으로 각자의 개성이 표현되었다.        



여성국극의 쇠퇴, 그리고 코로나19


여성국극이 쇠퇴한 이유로는 천편일률적인 레퍼토리, TV․영화 등 대중매체의 발달, 정부의 문화정책 등의 요인이 있다. 거기에 더해 여성국극의 서정적인 작품세계는 6.25전쟁 이후 현실에 대한 부정 또는 회피의 측면에서 대중의 열렬한 호응을 받지만, 역설적으로 산업화 이후에는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어 대중에게 외면당한다.*4 여성국극은 급격한 사회 변화를 계기로 부흥하고 또 쇠퇴했다.   


2020년 현재, 대한민국은 코로나19로 인한 급격한 사회 변화를 겪고 있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거리를 돌아다닐 수 없고, 비대면 연락이 오히려 미덕이다. 예술분야에서는 ‘공연의 현장성’ 때문에 극히 ‘폄하’되었던 온라인 공연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여성국극이 쇠퇴한 시기와 우리가 사는 2020년은 ‘급격한 사회 변화’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사회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3인의 등장인물이 국극을 바라보는 관점은 국극에 대한 태도, 그리고 각자 삶의 방향을 결정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일상도 삶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변할 것이다. 변화에 따른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각자의 삶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므로.

                                               


              

*이 글은 한국만화영상진흥원 2020 만화웹툰 평론 공모전 가작 수상작입니다.




*1. 경향신문, 1984.11.21. 「여성국극의 맥」

*2. 김경수 여사는 이 글의 첫 부분에 나온 인터뷰의 주인공 김진진 여사의 동생으로 주로 남역을 맡았다.

*3. 한국일보, 2020.05.21. 「1950년대 국극 웹툰 ‘정년이’ … “배우 김태리를 모델로 그렸어요”」

*4. 백현미(2005), 「1950년대 여성국극의 성 정치성」, ‘한국극예술연구’ vol12, pp.174~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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