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은 식민지다>
2020년, 광주의 총인구가 만 명이 줄었다. 한 해 동안 무려 23만 명이 광주를 떠났단다. 그들 대부분이 수도권으로 향했을 거란 사실은 안 봐도 뻔하다. 먹고 살기 좋아져 어디 강남에 한몫 단단히 잡은 거라면 떠나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겠지만, 대다수가 되려 먹고 살기 위해 지방을 떠난다. 이건 분명 문제가 있다. 지방은 더 이상 인생 전반의 기반이 되기에는 너무 빈약한 땅이 되어가고 있다.
시골 사람인 내가 취업준비 전선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광주에 자취방을 계약한 것이었다. 5년이나 머물렀으니 광주는 내게 가장 편한 대도시였다. 학교 도서관도 다니고, 인턴이나 계약직 생활도 하며 보람찬 취업준비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월세방을 계약하고 일주일 만에 후회했다. 잠깐이라도 일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이메일로 오는 채용공고를 열어보면 적당한 곳은 죄다 서울에 있었다. 결국에는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아 한 달 만에 광주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새로 향한 곳은 부산이었다. 오래 살아 익숙하고 고향과 지리적으로도 더 가까운 곳은 광주였지만, 서부 경남을 적으로 둔 내게 부산이 경상도는 경상도라고 마음은 이곳에 있을 때 더 편했다. 광주라는 광역시 급의 대도시에서 제법 오래 살았음에도 부산의 화려함과 분주함에 마음이 들떴다. 그런데 이곳의 사람들도 부산에 일자리가 없다며 나날이 증가하는 인구 유출을 걱정했다. 대한민국의 명실상부 제2의 도시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서울과 400Km나 떨어져 있다는 지리적 한계는 그 위상마저 땅으로 꺼트리는 듯 싶었다.
이런 현상을 막기 위해 정부에서 혁신도시부터 수도 이전까지 다양한 정책을 펼쳤으나, 그다지 효과적이지는 못했다. 지방으로 이전한 공기업 직원들은 어떻게 다시 서울로 향할 수 있을까 궁리를 하고, 지방, 특히나 시골 촌구석으로 발령이 나는 것은 유배를 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사표를 쓰기도 한단다. 진주 혁신도시에 위치한 한 초등학교의 교사는 학부모로부터 경상도 사투리를 쓰지 말아 달라는 황당한 민원을 받기까지 했다. 이런 세태를 비판한다 치면, “억울해? 서울 살든지.”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 황당하다. 이게 열등감으로 느껴지는가? 물론 서울이 지방보다 편할 수는 있겠지만, 어느새 서울과 지방 사이에는 눈에 보이는 위계까지 생겨 버렸다.
지방 대학의 명성도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대학은 인서울과 지방대로 양분됐다. 내가 고등학생이던 때도 주변 많은 친구들이 ‘서울 드림’을 꿈꿨고, 경상도에서 공부 꽤나 해야 갈 수 있던 부산대, 경북대에 합격해도 사립 인서울을 선택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지방 대학은 아무래도 인서울만큼의 매력이 없었다. 당장의 생활비와 등록금이 부담스럽기는 해도, 대학의 성장 가능성과 개인의 발전을 위한 인프라를 생각한다면 서울 생활을 한다는 자체가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느껴졌다. 그에 반해 지방의 대학은 어린 학생들에게 있어서 설득력이 떨어졌다. 지역이라는 핸디캡이 있다면 대학이 나서서 인재를 모셔와야 할 텐데, 지방의 대학들은 노력이 거의 없었다. 이름값도 점점 떨어지는 추세지만, 아직도 현실 파악이 덜 된 것 같다. 학교가 학생들의 애교심을 부추기는 방법을 모른다. 지금 재학생들이 당장 학교를 빛내지 못하더라도, 이들의 애교심과 자부심이 미래의 인재를 모셔오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여전히 깨닫지 못한 것 같다. 어려울 게 뭐가 있는가? 저렴하게 취업률을 운운하며 ‘오세요, 오세요’. 이렇게 대놓고 홍보할 돈을 조금 더 고급스럽게 쓸 방안을 고안하라는 의미다. 지역의 인재가 유출되는 상황은 이제 제법 놀라울 정도로 심각해지고만 있다.
지방 대학의 열악한 상황이 겹치면서 지역은 계속해서 주변화되는 동시에 잊히는 중이다. 몇몇 예시를 나열해보자.
첫 번째, 인천에 있는 수도권 쓰레기 매립지 사용이 2025년 중단된다. 서울은 거금을 들고 자신들의 쓰레기를 처리할 다른 지역을 찾는다.
두 번째, 탈원전 백지화를 주장한 윤석열이 당선되며, 원전은 계속해서 돌아가게 될 것 같다. 대한민국의 반이 사는데도 그 좋다는 원자력 발전소가 수도권에는 없다. (지질적인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세 번째, 언젠가부터는 첫눈 소식을 카카오톡 채팅방에서 확인하게 됐다. 막상 창밖에는 비조차 내리지 않으니, 카톡에서 알리는 첫눈 소식이 광주의 것일 리 없었다.
네 번째, 2017년 두 번째 수능을 코앞에 둔 어느 날, 포항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다. 포항과 제법 떨어진 우리 지역에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지만, 그 혼돈의 여파는 실감됐다. 수능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정말 큰 만큼 미뤄지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 일부 사람들은 정부의 이런 결정을 비난했다. -
이렇게 지방이 서울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지방부터 서울까지 다 똑같은 인간들이 사는 곳이지만, 한국 사회는 유난히도 서울 중심으로 돌아간다. 과연 지진이 포항이 아니라 서울에서 났다면 같은 반응이었을까. 꼭 필요한 혐오 시설은 왜 서울로 들어올 수 없을까. 이럴 거면 카카오의 본사는 왜 제주도에 있을까.
지방은 서울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지방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할 뿐인데도, 서울은 철모르는 아이처럼 지방의 희생과 뒷바라지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는 너무나 뿌리 깊어 해결하기에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다만 지역 언론의 부흥이 이를 통한 문제를 해소해줄 수 있을 거라는 실낱같은 확신은 있다.
중앙의 언론은 지역의 소식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 책상 한 면을 족히 뒤덮고도 남는 커다랗고 두꺼운 40면 안팎의 신문도 지역 면은 몇 장 되지 않는다. 지방에서 전할만한 소식들 대부분이 솔직히 소위 말하는 뉴스 가치가 떨어지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서울을 중앙으로 부르는 이 시점에서, 지역을 위할 수 있는 것은 지역 언론밖에 없다. 지역 언론의 존재 자체가 지역 민주주의의 존속을 유지하는 데 기여 한다는 것이다. 종국에는 지역 언론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거창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유난히 길고 거셌던 어느 해 장맛비에 광주전남이 물바다가 되었지만, 한 달 이상 꾸준히 관련 소식을 전한 건 당시 내가 일했던 광주의 방송사가 유일했고, 계속해서 지역성이 옅어지는 상황에서도 이를 유지하기 위한 웹예능을 제작하는 것도 레거시에선 지금 내가 일하는 부산의 방송사가 유일하다. 광주와 부산, 이 두 지역 방송국에서 잠시나마 일한 것이지만 지역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지역 방송사가 전부였다. 지역과 조직의 성격이 정반대인 곳을 경험하며 차이를 꽤 많이 느낄 것이라고 단정했던 것과 다르게 지역 언론이 가진 역할 그 자체는 전혀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지역의 안녕과 다양성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때로는 외로웠지만, 그만큼 자부심과 사명감도 있다. 지역민조차 지역 언론을 괄시해도 그 자리를 지켜야 할 이유가 명명백백히 느껴졌다. 대부분 지역 방송국들의 주머니 사정과 인식이 점차 열악해져 가고 있으나 콘텐츠 회사로서 콘텐츠를 위해 살아남아야 한다는 자각이 존재하는 이상, 지역민들의 차게 식은 마음을 언젠가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공감과 공명이 절실한 상황이다.
지방에서 태어나, 지방에서 대학을 나오고, 지방의 여러 언론사에 발가락을 살짝 담갔고, 그렇기에 누구보다 지방을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이런 나조차 언젠가 지방을 떠나게 될까. 지금은 최대한 지방을 떠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발악하고 있다. 서울의 미친 집값과 물가, 알량한 자존심이 지방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지만, 서울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이 핀트 나간 연유에서라도 지방에 남고 싶다.
문과 출신이 지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거나, 그다지 좋은 환경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렇기에 다들 서울로 떠난다는 것도 역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방을 살아가는 젊은이로서 나 역시 너무 쉽게 같은 전철을 밟고 싶지는 않다. 내가 자랐던 곳을 내 손으로 일구며 앞으로도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 되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