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으라. 또 물으라.
서비스란 무엇일까.
이 질문은 대답하는 사람 나이에 따라서 상당히 다른 답을 이끌어낼 수 있는 질문이다. 우선 초등학교 저학년 친구들에게 물어본다면 십중팔구 ‘웃는 거요.’라는 답이 돌아올 것이며, (물어본 적은 없지만 꽤나 확신한다.) 중학생쯤에게 물어본다면 ‘친절하게 손님 접대하는 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반면 혹독한 알바판을 통해 세상이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성인들은 ‘무형으로 제공되는 재화’라는 똑소리 나는 대답을 내놓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웃으며 친절하게 무형의 재화를 제공하는’ 필자는 본인을 뭐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많은 분들을 실망시켜드려 죄송하지만 우리는 보관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맡아두는 것은 손님의 ‘기분’이다.
비행기 안에서 방금 만난 생면부지 두 사람은 서비스 제공자와 손님이라는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잠깐의 동행 관계가 이어지는 동안 손님은 자신의 기분을 서비스 제공자의 손에 맡긴다. 카센터에서 차를 수리공에게 맡기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귀하디 귀한 신분인 손님의 ‘기분’. 어쩐지 ‘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꾸벅 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어색한 첫 만남 후, 손님의 기분을 안전한 금고에 넣고 열쇠를 단단히 채운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수십 명의 기분은 마치 시시각각 색이 바뀌는 투명한 수정구슬 같다.
이제 필자에게는 미션이 주어졌다. 특명. 수정 구슬을 지켜라. 깊게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눈에 힘을 빡 준다. 착륙할 때까지 기분 베이비 시팅에 전념을 다 해보자.
“죄송하지만 비빔밥은 지금 수량이 부족한데 혹시 닭고기 안심 스테이크는….”
닭고기 안심 스테이크 앞에 아름다운 형용사를 열 개 정도 갖다 붙이며 부단히 노력했지만 이미 글렀다. 수정 구슬이 오렌지 색을 무섭게 내뿜는다.
“대단히 죄송하지만 오늘은 만석인지라 바꿔드릴 수 있는 자리가….”
머피의 법칙은 세상의 진리이다. 하필이면 먹고 싶은 메뉴를 못 먹은 손님 자리가 말썽이다. 이미 빨갛게 변한 구슬을 만져보니 데일 듯 뜨겁다.
사람의 기분이란 원래 흩날리는 반려동물의 털처럼 쉽게 방향을 틀고 이리저리 나풀거리는 법이다. 부족한 비빔밥, 생각보다 비싼 와이파이 요금, 자꾸만 늦어지는 출발. 비행기 안에서는 기분이 나빠질 일이 많기도 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빠르게 손님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오해’라는 무서운 끝판 대장이다.
필자가 한국행 비행기에 손님으로 몸을 실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열 시간 가까운 살인적인 밤 비행을 나기 위해 오랜만에 비즈니스 클래스를 끊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좌석 위에 누워 기류를 온몸으로 느끼며 단잠을 청하길 한참. 10분 같은 열 시간이 지나고 눈꺼풀을 두드리는 햇빛에 저절로 잠이 깼다. 착륙하기 40분 전. 손님들은 화장실에 가랴 승무원들은 마지막 서비스를 하랴 모두 정신없이 바쁜 때였다.
그때 한 승무원이 필자의 앞자리에 앉은 손님에게 다가가 커피를 권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손님은 노트북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가볍게 손을 저으며 거절했다. 이제 내 차례인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목을 가다듬었다. 물론 필자는 비행기 커피가 아니라 지상의 커피가 간절한 승무원 1이다. 정중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 커피를 거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동료 승무원은 쌩하고 바람을 일으키며 내 앞을 지나쳤다.
순간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가 내게 커피를 권하지 않은 이유에 대한 여러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첫 번째. 내가 똑바로 앉은 게 아니라 누워서 허리만 대충 일으켜 세운 탓에 그녀는 나를 보지 못했다. 두 번째. 그녀는 출발 전 ‘필요한 게 없으니 신경 쓰지 말라’ 던 내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세 번째. 내 얼굴은 커피를 싫어하게 생긴 얼굴이다.
강아지 상, 고양이 상은 들어봤어도 커피 상은 아직 못 들어본 바, 이유는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일 것이다. 순간 아주 조금이지만 섭섭한 마음이 밀려왔다. 먹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는 주제에 ‘나한테도 물어봐주지….’하는 얼토당토않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사람 기분이라는 게 참 이상하다. 작은 일에도 쉽게 토라지고 상처 입는다. 게다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자꾸만 안 좋은 쪽으로만 이야기를 발전시킨다.
사실 그녀가 내게 커피를 권하지 않은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간다. 승무원들은 제 집 냉장고 안 양파가 시들어가는 건 몰라도 비행기 냉장고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훤히 꿰고 있는 사람들이다. 굳이 먼저 물어보지 않아도 언제 서비스가 가능한지, 또 무슨 메뉴가 있는지 누구 보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동료 승무원이 손님으로 탔을 때 뭐가 필요하냐, 이거 마실래 저거 먹을래 하며 귀찮게 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이니까.
하지만 만약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이’가 아닌 일반 승객이 이런 경험을 했다면 어떨까. 분명 수많은 오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을 것이다.
‘뭐지? 나한테는 왜 안 물어보지? 저 사람은 백인이고 나는 동양인이라 차별하는 거야?’
‘내가 할인 티켓 썼다고 무시하는 건가?’
살벌하게 들리지 모르지만 이게 현실이다. 아주 작은 행동 하나 말 한마디가 도끼가 되어 기분이라는 구슬을 내려 찍을 수 있다. 열 시간 동안 고이고이 모셔두었던 손님의 기분이 깨져버리는 데는 10초도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오해가 무서운 것이다.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곳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일을 내버리니까.
생각에 몰두하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린 것뿐인데 인상을 썼다고 한다거나, 손을 가볍게 움직인 것뿐인데 멀리서 손가락질을 당했다며 뛰어온다거나. 보호 본능이 강해서 그런지 아니면 요즘 세상이 너무 험해서 그렇게 된 건지 사람들의 마음은 어째 점점 나쁜 쪽으로만 흐르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승무원들의 마음속에는 리스트가 있다. 비행을 하면 할수록 길어지는 ‘하면 안 돼’ 리스트. 혹시에 혹시, 그 혹시에 또 혹시라도 오해를 살지 모르니 애초에 봉인해버리는 말이나 행동들이 이 목록에 오른다. 가끔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상상도 못 할 그들의 리스트에 입이 떡 벌어지곤 한다. 그럴 때마다 하늘 위가 아니라 살얼음판 위를 날아가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오해. 잘못된 해석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완벽하게 연결되지 못한, 외롭게 떨어진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통한다. 하지만 각자 다른 외국어를 쓰는 것 마냥 우리는 좀처럼 서로를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곤 저마다의 착각에 빠져 오해의 바다를 헤엄친다. 만약 우리가 영화 아바타에서처럼 신체 부위를 연결해 소통할 수 있다면, 혹은 전자두뇌를 링크시킬 수 있다면 오해란 구시대의 유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려면 아직 몇 년 더 남은 것 같다.
그럼 이 가혹한 현실 앞, 인류에게 희망은 없는 걸까. 그럴 리 없다. 세탁기가 없던 시절 우리는 강가에서 빨래를 잘만 했고 가스레인지가 없던 시절 모닥불에 생선을 걸어 저녁상을 차렸다. 아바타 꼬리나 전자두뇌만큼 쿨하지는 않지만 우리에게는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도구가 있다. 바로 언어, 말이다.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으시는가? 물으라. 조금 기분이 상할 듯 말 듯하는가? 물으라. 상대방의 제스처가 이상해 보이는가? 물으라. 묻는다는 것은 점검한다는 뜻이다. “내가 이해한 것은 이러한데 당신의 뜻과 같습니까?”라는 뜻이다. 결코 부끄러울 것도 꺼릴 일도 아니다. 입을 열면 오해의 바다에서 수면 위로 올라와 소통의 하늘에서 자유롭게 날갯짓을 할 수 있다. 어렵지 않으니 한 번 해보자.
“저기요, 지금 주문해도 되나요? 저도 커피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