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끝자락에 쓰는 반도체인의 소감
회사 메일을 제외하고, 여자 친구에게 쓰는 편지를 제외하면 정말 오랜만에 글이라는 것을 써보는 것 같다.
사실 첫 번째 글은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서러움에 쓴 하소연의 느낌이 강했고, 이런 글을 누가 보겠냐고 생각하면서 작성했다. 그리고 브런치의 알람이 귀찮아 브런치를 지워버린 후 글을 쓴 것도 잊고 살았다. 아이패드를 구입하며 앱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브런치를 다시 설치하게 되었는데, 우선 이 글이 도움이 되었다는 댓글이 많아서 너무 놀랐고, 생각하지 못한 뿌듯함이 찾아왔다.
그래서 글을 다시 좀 써보기로 결심했다. 업무 중 생기는 나의 감정들이 누군가에게 이 업무를 간접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면, 그것 또한 좋은 글이 아닐까.(물론 이 업계를 오지 않기 위한 간접체험입니다. 탈반은 반도체인의 매년의 키워드입니다.)
2021년은 정말 바쁜 한 해였다. 근무지를 평택으로 옮기게 된 후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그 중 세 가지를 꼽아본다면.
1. 출퇴근 시간
집에서 왕복 30분 컷으로 8시 10분에 출발해도 정시에 출근하던 내가 평택으로 출근하면서 왕복 2시간 정도의 거리를 출근하게 되었다. 평소에 여자 친구 집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보다는 훨씬 짧기 때문에 적응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5:00 - 6:30 사이의 지옥 퇴근길은 정말이지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한국에서 깜빡이는 내가 옆으로 갈 거니까 좀 양보해달라는 신호가 아니라 내가 옆으로 갈 거니까 어떻게든 나의 차선 이동을 막아보라는 신호가 분명하다.
하나 아쉬운 점은 그 긴 시간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고, 어떻게 흘려보내야 할지를 고민했다는 점이다. 뒤늦게나마 CNN 팟캐스트를 듣기 시작해서 더 아쉬운 부분이다. 앞으로도 평택은 더 많은 팹이 지어질 예정이니 그 시간을 잘 활용하는 방법을 잘 고안해볼 것.
2. 양산 라인 -> 셋업 라인
그동안은 양산 라인을 커버해왔는데, 평택 라인은 S사에서 현재 주력으로 생각하는 곳으로, (겁나 크다. 화성 Fab을 한 3개 정도 붙인 크기다) 수많은 설비들이 많이 들어가고,,
빠르게 셋업을 완료해야 한다. 원래 있던 곳보다 훨씬 급박한 분위기 속에서(양산설비가 죽으면 대체 설비가 있어 백업이 빠르지 않아도 괜찮은 경우가 있지만, 셋업의 경우에는 얘기가 다르다.) 적응하는데 약간의 고통을 느꼈다. 대신 새로 적용하는 부분이라던지, 기존에 없던 이슈가 생기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복사 붙여 넣기를 잘하는 게 업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컴퓨터가 아니라 사람이) 업무적으로는 부담이 적었다. 역시 장점과 단점은 공존하는 법이다.
3. 업무의 주체 변화
인원이 워낙 부족해서 거의 혼자 일을 해왔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넓고 많은 곳을 어떻게 커버했는지 스스로가 너무 대견할 지경이다. (회사 놈들은 원래 사람을 죽기 직전까지만 일 할 정도로 뽑는다고 하더니.) 누구의 지시로 일을 하다가 이제 주체적으로 일을 하게 되며 선배의 답답함도 느끼고, 후배의 서러움도 고루 느낄 수 있는 한 해였다. 혼자 사무실에 있을 때면 옆 사람의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혼자 꾸역꾸역 일하고 있는 나를 보며 Fab이 터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지만(생각만 했습니다. 터지면 직장을 잃어요.) 결국 지나고 나면 그냥 그랬었던 일이 되는 것 같다. (군대에서 겪고도 또 속냐)
그 외에도 다양한 일들이 있었지만, 큰 변화를 꼽자면 위의 세 가지가 될 것 같다.
내년 이 맘때에는 자기 반성이 아니라 22년의 성과를 쓰는 글을 올릴 수 있도록 열심히 달려야겠다.
2021년에 써놓은 글을 22년에 업로드해서 살짝 민망하지만, 우선 시작이 반이라는 생각으로 부족한 자기반성의 글을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