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십여 년을 정신없이 살아온 것 같다. 정신은 붙잡아야 자신을 인식하고, 새로운 계획과 반성도 하련마는 무조건 앞만 바라보고 살아온 듯하다. 후회는 없다. 그러나 회한은 남아, 아직도 아련한 미련이 조수처럼 밀려오고 있다. 시간은 그렇게 나를 스치듯 지나, 자락은 이미 잊히고 있었다.삶은 끝까지 실험적이다. 방심을 하면, 늘 주변에 물어뜯을 준비가 된 승냥이들이 즐비했다. 주변이 평안해 보이면, 난 언제나 불안하다. 일생동안 평안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이런 생각의 기저에는 어린 시절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 존재라는 걸 어리석게도 나는 지금도 믿는다. 그런 믿음은 결국 나부터 왜소하게 만들지만, 이미 뜯어고치기에는 지나온 상념의 시간이 길고도 험난했다. 근래에 가장 관심이 가는 것은 또 다른 직업을 잡아야 한다는 조바심이 은근히 짓누른 걸 느낄 수 있다. 나이 육십에도 자본의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것은 필요에 의한 것이기도 하고, 일하는 것 외에는 아직 남은 수많은 시간을 건널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아직은 미정이지만 기대되는 면도 없지 않다.
길은 어디에나 있었다. 다만 내가 가보지 않았을 뿐, 누구나 자신이 다녀온 길에 대해서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고 있다. 여러 갈래길 중에서 나는 그 길을 선택했을 뿐이다. 이제 내 앞에는 다른 선택이 기다리고 있다. 한번 출발을 하면 아마도 다른 길은 못 걸어볼 것이다. 그나마 좀 늦었다지만 또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다는 희열이 나를 들뜨게 한다.
버리기의 미학
나는 무언가 버리기로 했다. 버리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없다. 잔은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동안 삶의 흔적은 이런저런 물건들로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언제 다시 소용될지 모른다는 미련이 쓸데없는 잡동사니로 나를 포위하고 있다. 먼저 내방의 물건부터 정리하고 버리기로 한다. 그립고, 아쉬움에 못내 버리지 못한 많은 사용기한이 이미 훌쩍 넘긴 옷들이며, 정리가 서툴어 한쪽에 처박아 둔 잡동사니들이 비명을 지르며 소환에 불응이라도 하듯 먼지를 풍기며 나온다. 한참을 정리하며 버릴 것은 재활용 비닐에 넣고, 쓸만한 것은 다시 닦아 자리를 잡아주니 숨어 있던 공간이 나온다. 한동안 몰두를 하니 새로운 시야가 생기고, 구상이 불현듯 생각나 이리저리 옮기니 재미가 붙었다.
비우면 그동안 안 보이던 공간이 나타났다. 채우기에 급급했던 지난 시간이 씁쓸하다. 나를 차분히 돌아보는 연습이 부족했음을 인정하게 된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집단인 직장에서의 관계는 유난히 어울리기 좋아하던 내 성격과 맞물리어 수많은 거품에 불과한 관계로 전화번호로 남아 있었다. 굳이 지울 필요성을 못 느껴 천여 개나 쌓였다. 이젠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아직은 재직기간 중이니 서두를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생각도 좀 더 전향적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동안의 켜켜이 쌓인 나의 뇌리 속 무의식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농후했다. 이제는 전과는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무슨 일이든 결국 사람의 생각 속에 움직이는 것이 유기체인 인간이란 존재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환경을 바꾸고, 습관을 달리하여 새로운 생각이 나를 지배하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채우기의 갈망
다른 생각을 하기로 한다. 그러려면 환경을 바꿔야 했다. 그동안의 루틴이 나의 족쇄로 나를 놔주지 않았다. 다른 세계로 나가지 않으면 나만의 알을 깨지 못한다는 데미안의 구절은여전히 진리로 생각된다. 장애인 직업재활 교사로 봉사활동을 시작해 보았다. 여성들의 장신구인 파우치를 만드는 장애 청소년 직업재활 보호작업장에서 나는 오히려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기구를 이용하니 간단한 작업임에도 그들은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사지육신이 멀쩡한 나는 어린 나이에도 뇌성마비의 불편한 손을 들어 제대로 된 작업을 해보려는 아이들을 보며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당연한 건 없었다. 그저 그렇게 태어나 당연하게 생각할 뿐, 나의 모든 것은 고마워할 줄 모르는 충분조건인양 살아왔던 것이었다. 여전히 나는 깨닫지 못하는 어린 싱클레어일 뿐이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배워야 할 것은 도처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생각에 살아온 세월이 부끄러웠다. 나는 편향된 사고로 나이만 먹었구나 하는 상념이 나를 짓누른다. 다시 보는 법을 배워야 했다. 세상은 내 생각과는 다르게 다양하고 고유의 성질이 있었다. 이제라도 조금씩 깨달을 수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볼 수 없을 때까지, 생각할 수 없을 때까지 배우고 채워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아직은 살아서 느끼고 채워야 할 나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루하루가 낯설지만 늘 새롭고 충만하기를 바란다.
에필로그
지금 이후의 세상은 과도기 연속선상의 혼미한 세계가 펼쳐질 공산이 크다. 작금의 돌아가는 세상은 이전에 보지 못한 비정상적인 풍경이 다반사다. 어차피 산업화와 자본화 세계는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구조로 가는 세계는 나름 꽤나 메커니즘 적이다. 경제논리 앞에 모든 것은 무력감에 죽어간다. 제로섬 게임에 익숙한 무리들 만이 삶의 연속선상에서 자유로울 뿐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소리소문 없이 주변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도시의 일상은 늘 그렇게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각자의 세계가 있듯이, 한 영역에서 각기 다른 삶들을 살고 있다. 누군가는 삶의 희열에 겨워 행복의 비명을 지르기도 하지만, 다수는 숨죽여 소외감에 몸부림친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는 지금과 같은 혼동의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안정을 그리워할 것이다. 그전까지는 미쳐버린 빠빠라기들을 그저 지켜볼 뿐이다. 다시 고요한 바람이 불어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