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라스트 소셜 라이프

참회록

by 포레스임


아들인 나는 늘 무뚝뚝하기만 했다. 모든 게 시큰둥하고 심드렁하니 별 재미가 없었다. 특히 나의 어머니에게...., 마음을 표현한다는 것은 늘 언감생심이었다. 겨우내 미끄러지신 어머니는 뇌진탕으로 혈류성 치매가 찾아와 김포의 낮동안 보호를 한다는 치매재활센터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등나무가 시원하게 그늘을 만들어주어 벤치가 있던 그곳에 어머니는 말없이 초점 잃은 눈동자로 나를 보는 둥, 마는 둥 하셨다. 여동생의 집에서 그곳으로 모셔가 저녁나절에 데려다주는 그곳을 좀 더 자주 가봤어야 한다는 생각이 못내 가련하다.


나이 육십에 정년퇴직을 하고, 주간보호센터라는 곳에 재취업을 하여 사회복지사란 직업을 얻긴 했으나, 어디서부터 갈피를 잡을지는 미지수다. 일단은 잘 적응이나 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확신은 없으나 확정할 수는 있었다. 나는 계속 움직여야 한다. 하루의 루틴이 있어야 살아가는 보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동생에게 맡기고, 제대로 돌보지 못한 업보는 직업적인 일로 되돌아오는 현실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수많은 어르신들을 마주할 수 없는 부모님 인양 돌보고, 어르며 빚을 갚듯 살아갈 참이다.


보름 전 채용계약을 하고 많은 준비할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했으나 내일로 다가온 출근일자에 시간의 두려움이 성큼 코앞에 이르렀다. 내일부터는 많은 것이 바뀔 것이다. 지난 일 년 동안의 시간이 달리는 말의 속도와 무엇이 다르랴 싶다. 순식간이었다. 나름 지난 시간에 의지해 연이은 일을 하고파, 공기업 채용 시 늘어난 몇 년의 정년이란 시간에 묻히고 싶었으나 경쟁은 냉혹하고, 나에겐 시간이 없었다. 그나마 선택지가 있었다는 것은 나에겐 다행이었다.


주간보호센터를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다. 어르신들의 마지막 사회생활이라고...., 일생동안 많은 이를 만나고, 얘기하고, 소통한다고 생각하지만, 인생의 황혼은 그리 많은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작년 정년퇴직 후 일 년 동안 많은 생각이 이를 인지하게 만들었다. 하루 종일 시립도서관의 자료실에 묻혀, 한마디도 할 필요가 없는 며칠을 겪고 보니 대화의 중요성을 절감하고는 했다. 일부러 누구에게도 연락을 않으니, 자연스레 연락을 해오는 이도 없어졌다. 목적집단인 직장과의 인연이 끊어지니, 자연히 대화도 끊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오히려 한 줄의 문장이나 단어를 읽어가며, 아둔했던 지난날에 쓴웃음이 배어 나왔다.


하지만 인간은 무리를 이루어 사회를 만드는 동물로서, 이러한 어설픈 동안거는 며칠을 못 넘기고는 했다. 이 글을 빌어 광윤 형님과 동기 아우에게 감사와 미안한 마음을 표하고 싶다. 나와 뒤늦은 나에게도 열정적으로 방송대에서 만난 동문으로 늘 나를 격려하시고 좋은 말씀으로 다른 길이 있음을 일깨워 주신 형님 그리고 격의 없이 대하는 나를 좋아하고, 나를 형같이 대하던 동생으로, 두 사람은 나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기본 토양과도 같이 나를 이끌어 주었다. 지난 일 년 동안 두 사람은 번갈아 가며 나를 위로하고, 할 수 있음을 북돋아 주었다.


아마도 사회복지분야는 나의 마지막 선택지로 많은 일을 겪을 것이다. 그리고 센터에서 나는 마지막 사회생활을 하시는 수많은 어르신들을 만날 것이다. 그동안의 세계와는 또 다른 세상에서 나는 많은 일을 보고, 느끼며 또 다른 하루하루를 맞이할 것이다. 많은 익숙함이 있었다. 이젠 그런 것들과 작별을 고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새로운 것이 들어설 틈이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부터 익숙한 것을 습관처럼 찾아댄다. 생각으로 생각을 바꾸긴 어렵다. 결국 육체가 나서야 한다. 몸이 바쁘고 힘이 들수록 생각이란 놈은 여유가 없어진다.



월요일 근무가 시작되었다. 오전의 송영업무로 모인 어르신들이 소파의 자기 이름이 적힌 자리에 가지런히 앉아 계신다. 집보다는 일정시간에 이곳으로 모여 인지학습과 실버체조, 그리고 노래교실 등의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고, 점심과 원하면 저녁까지 챙기는 이곳을 대다수 어르신들은 선호하셨다. 웃음으로 이분들을 대하면 당연하다는 듯, 응답의 미소를 보이신다. 며칠 지내보니 내 적성에 맞는 듯하다. 우선은 어르신들을 대하는 것부터가 무척 편하게 다가왔다. 이제는 더 이상 뵐 수 없는 하늘에 계신 부모님 인양 대하면 무리는 없을 듯싶고, 한 분 한 분이 다들 푸근하게 맞아 주셨다.


내 나이에는 장기요양 기관만이 사회복지사로 취업이 가능하다기에, 지원하였는데 역시 잘 맞는 듯도 하였다. 이 분들을 위한 숙지는 어느 정도 끝나가는 것 같다. 그러기 위해 피곤하지만 퇴근 후, 한 분 한 분 프로그램 평가를 적어 넣으며 매일의 일을 기록하고 있다. 내 어머니의 지난 자취를 더듬어 보면, 어르신들은 마지막 사회생활을 하고 계신 것이다. 어머님도 주간보호센터를 몇 달 이용하시고, 결국 요양원으로 옮기셨다.


와상환자 즉, 누워있는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엄마를 찾는 어린아이 심정으로 어머니 곁으로 요양원을 찾을 때면 입구를 지나 복도의 불빛이 너무 싫었다.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하려 일부러 은은히 빛을 내는 LED등은 왠지 모를 심연의 늪을 걷는 기분이었다. 왜 나의 어머니가 이런 곳에 홀로 있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그 늪은 점점 빠져드는 수렁 같아 늘 칙칙했었다.


가을로 접어든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가을은 아무 말 없이 낙엽만 떨구고 있었다. 늦가을의 퇴근길은 참 쓸쓸하다. 지금은 누구에게도 연락할 수 없다. 이 시간이 지나고, 숙달은 아니라도 숙련은 되어야 나름 자신감을 갖고 누구에게든 떳떳할 수 있다. 숙련은 되어가고 있었다. 어르신들의 함자와 특이사항을 숙지하고, 그분들의 기분 변화에 맞춰 대화를 이끌어가는 것이 점차 자연스러워졌다. 처음에는 그저 직업적인 의무감이었으나, 한 분 한 분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그분들의 미소에 반응하는 일은, 내가 잃어버렸던 어떤 감각을 되찾아주는 기분이었다.


어르신들 거의 대부분은 경계성치매 내지 실제 치매를 갖고 계셨다. 요양등급 3, 4, 5 등급의 분들이 재가복지센터를 다니신다. 특히 치매를 앓는 어르신들을 대할 때면, 내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지고는 하였다. 기억의 문이 굳게 닫혀버린 채 초점 없이 나를 보시던 어머니의 눈동자. 그때 내가 느꼈던 무력감과 죄책감은, 지금 내가 어르신들께 건네는 따뜻한 손길과 말 한마디에 담겨 희미하게나마 속죄의 빛을 발하는 듯했다.


어머니께 하지 못했던 표현, 드리지 못했던 따스함을 이분들에게 나누어 드리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업보'를 갚는 방식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머니가 주간보호센터를 이용하시다가 결국 요양원으로 옮기셔야 했던 그 과정이, 나에게는 센터의 어르신들 한 분 한 분이 밟아갈 수 있는 미래의 경로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지금 이분들의 '마지막 사회생활'의 동반자로서 그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게 만들어 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다.


늦가을의 퇴근길, 차가운 공기가 옷깃을 파고들 때마다 느껴지는 쓸쓸함은 여전했다. 그러나 더 이상 지난 일 년처럼 홀로 도서관에 묻혀 스스로에게 침묵을 강요하지 않았다. 낮 동안 어르신들과 나눈 짧은 농담, 함께 부른 노래의 가사, 체조 시간에 터져 나온 작은 웃음소리들이 퇴근길 내내 머릿속을 맴돌며 그 쓸쓸함을 희석시켜 주었다.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프로그램 평가를 기록하는 시간은 나만의 참회록을 쓰는 시간이었다. 어르신들의 작은 변화, 내가 드린 서비스의 효과, 그리고 다음 날을 위한 계획까지 꼼꼼히 적어 내려갔다. 그 기록 속에는, 어머니를 향한 뒤늦은 후회와 함께 현재를 살아가려는 나의 간절한 노력이 담겨 있었다.


어르신들의 마지막 사회생활인 이곳에서, 나 또한 새로운 형태의 마지막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빚을 갚는 참회의 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잃어버렸던 나 자신을 다시 찾아내는 희망의 길이기도 했다. 이 새로운 궤도에서 나는 계속 움직일 것이다. 그래야만 살아가는 보람이, 그리고 어머니께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길 것 같았다. '참회록'은 이제 끝났다. 지금부터는 새로운 '성장기'의 시작이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AI와 저작권의 함수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