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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임 Jun 02. 2024

퇴역

지난 시간 속 여울진 기억들

"형님! 잘 지내시죠?.......,?

.... 전에 권중사입니다. 기억하시겠어요?"


"아........,○○이, 히야! 자네가......, 반갑네!, 잘 지내지?....., "


의외였고 뜻밖이었다. 너무 오래된 인연이라 기억조차 가물거린다.


"저 올해로 전역합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네요."


나보다 4년 여가 늦으니 전역할 때가 되긴 하였다. 원사계급으로 정년을 하니 본인도 감개가 무량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회생활에 대한 두려움으로 먼저 시작한 선배랍시고 나에게 연락을 한 것이리라 생각했다. 연락처도 내가 인천에서 공직생활을 한다고, 입대 동기들에게 들어서 수소문해서 찾아냈다고 한다.


 그와의 만남은 벌써 삼십 년을 다 넘어가는 아득한 추억의 단면들이 간간이 떠오른다. 춘천이 고향이라고 했다. 유난히 밝으면서 말수도 많았다. 그와의 근무는 유쾌한 날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언제 의정부 오 실 일 없으세요? 식사라도 한 번하시죠?"


"그래!, 마침 거기에  숙부님이 계셔서 한번 가려던 참인데 내가 연락할게!"


" 잘됐네요! 형님 꼭 오셔서 연락 주십시오!"


 원래는 매년 추석에는 강화의 벌초도 할 겸 찾아뵈었지만, 그의 전화를 받으니 병문안차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미쳤다. 권중사....., 그와의 인연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아득했다. 나는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기술 위탁장학생으로 계약 하사관으로 입대를 했었다. 학교를 다니며, 등록금과 책 등의 비용을 육군에서 댔으니 졸업과 동시에 군하사관으로 교육을 받고 임관했다. 요즘은 부사관이라 해서 그런 제도가 없는 것으로 아는데 당시의 집안형편상 나에겐 최선의 선택이었다. 청춘의 아침 햇살 같은 시기인 오 년 반을 군에서 보냈다.


 권중사는 처음에 하사계급으로 내 밑에 배속이 되었는데, 다감하면서 쾌활한 친구였다. 무엇이든 배우고자 했고, 당연히 질문도 많았다. 나는 전역을 1년 앞두고, 그와 영외거주 방을 얻어 동거를 한 적이 있었다. 원래는 부대 내의 2인 1실인 간부막사에서 지냈으나, 전역이 가까울수록 번거로운 면이 많아 영외거주를 선택했다. 보증금은 내가 내고 권에게는 월세의 반을 내는 조건이었다. 부대에서 호흡이 잘 맞으니 잠시 동안의 생활도 잘할 수 있을 거란 내 생각은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다른 상황을 맞게 되었다. 어쨌든 한동안은 재미있게 지냈다. 그와 찬거리들 사느라 재래시장도 다니고,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 깨나 마시며 지냈다.


어느 날은 그와 여흥이 나서, 당시 흔히 가던 나이트클럽을 찾았다. 그곳에서 젊디 젊은 청춘남녀가 어우러져 춤을 추니 무슨 일이야 없었겠는가? 한동안 어울려 몸을 흔들다가 피곤도 하여, 자리로 오니 그는 아직도 열심히 흔들어 댔다. 맥주를 따라 목을 축이다 보니, 웬 여자를 데리고 그가 왔다. "누구셔? 내가 물으니 의미 있는 미소만 보이고 그녀에게 맥주를 따랐다.  


 이후로 그는 퇴근 후 늦는 일이 잦아졌다. 훈련을 마치고 어느 날 늦게 돌아와 피곤하여 자리에 누웠다. 한 동안 곤하게 자는데,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시 뒤척였으나 이내 잠들고 말았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 화장실을 가려는데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내 옆에 권중사만 있는 것이 아닌, 웬 여자도 함께 잠들어 있었다. 난감하기도 하고, 화장실은 가야겠기에 밖으로 나서 다녀오는데 주인아주머니와 마주쳤다.


" 군인 분들이라 이런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남자 둘에 여자 하나가 같이 잠을 자면 좀 심각하네!"


"그게 아니라...., 저는 잠들어 있었는데, 새벽에 들어온 거 같습니다......, 여하튼 죄송합니다."


 나는 자초지종을 알아보고, 내가 나가겠다고 말하곤 서둘러 출근을 했다. 점심때 권중사를 불러 사정얘기를 들었다. 짐작대로 클럽에서 만난 여자와 사귀고 있었다. 어찌하다 너무 늦어져 여자의 집인 포천까지 가기가 힘들어 방으로 데리고 왔다고 하였다. 나는 같이 쓰는 방에서 나갈 테니 자유롭게 쓰라고 했다. 그는 나에게 보증금을 쥐어주며 그는 "죄송합니다. 형님!"이라며 계면쩍어했다. 나도 그의 손을 잡고 "잘해봐! 장가도 가야지!" 하며 서로 웃고 헤어졌다. 그것으로 그와의 몇 개월 동안의 동거가 끝이 났다.


 나는 얼마 후 전역을 하였고, 취업을 위해 동분서주하다 여의도의 어느 직장을 잡았었다. 권중사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그즈음이었다. 한번 볼 수 있냐는 전화였고, 저녁이나 먹자고 응답했다. 영등포에서 만난 그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술잔이 한순배 돌 즈음 그는 대뜸 돈을 좀 꿔달라는 말을 한다. 적은 금액이 아니라서 나 또한 취업을 한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라 정중히 힘들다는 말을 했지만 못내 찜찜했다. 그의 아내가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았다. 신내림을 받아 방안에 사당을 만들더니, 이런저런 용도로 감당 못할 카드빚을 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힘들겠다고 위로는 했지만, 그의 앞날이 걱정되었다.


 그렇게 긴 시간 속에 인연의 연결고리 없이 지내던 그와, 전역소식과 함께 한번 보자는 연락은 놀라웠다. 누구나 많은 인연과 갈림길 속에 지나치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다시 보기는 요원하고 잊히기 마련이다. 나에게 무슨 기억이 있기에 나를 다시 보고파하는 것일까? 못내 궁금하기도 하여, 얼마 후 휴일에 의정부의 숙부집으로 향했다. 출발 전에 그에게도 오후에 보자고 연락을 넣었다. 팔순의 작은아버님은 벌써 20년째 거동을 못하고 집에서 지내신다.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다는 인사로 갈음하고, 아직도 간병인 일을 하시는 숙모님께 인사치레 봉투를 쥐어드리곤 길을 나섰다.


 가능동이라는 동네에 산다고 했다. 그곳은 내가 군생활 시, 방을 얻어 자취를 한 곳이기에 의정부의 어느 곳 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옛 정취도 느끼고 싶어 버스를 탔다. 예상은 빗나갔다. 도무지 어디다 어딘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도 방위감각이 있어 한 곳에서 작정을 하고 내려봤다. 그에게 전화를 하고, 어느 건물 명칭을 대니, 정확히 잘 오셨다고 기다려 달라고 한다. 얼마 후 그가 나왔는데 나는 도무지 처음에는 알아볼 수 없었다. 하긴 삼십 년이 넘는 시간 속에 서로가 왕래발착도 없었는데 서로 알아본다는 게 쉽지 않았다.


"형님!...., 그대 로시네! 어떻게 그리 옛 모습 그대로 세요!" 


"오....., 허허 참 반갑네, 반가워! 나도 늙수그레 하지 뭘...., "


 사실 처음에 못 알아봤었다. 나보다 연배가 더 되어 보이고, 머리숱도 별로 없이 살이 찐 그를 내가 어찌 알아보겠는가. 말투나 얼굴의 턱선을 보고서야 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이곳까지 온 이유도 그와 동거를 한 곳이기도 하고, 부대까지 출퇴근 버스가 오가기에 가장 많이들 모여 사는 곳이기도 하여, 추억 삼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권은 이곳에서 삼십여 년을 넘게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의무기간 복무 후 전역하여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삶에 쫓겨 다녔지만, 그는 여전히 동네도 옮기지 않고 한 곳에서 삼십 년 세월을 버틴 것이다.


 그는 자기 집으로 나를 안내했다. 남의 집을 방문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챙길 것이 있기에, 극구 사양하고 근처 식당이나 가자고 했으나 혼자 산다며 식사준비를 해놨다고 잡아끈다.


"예전에 저하고 사신적도 있잖아요! 그냥 저 혼자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근처의 슈퍼라도 들러 뭔가 사려했지만, 그는 나의 팔을 잡고 그럴 필요 없다고 한사코 만류한다. 이런저런 생각이 교차했지만, 홀로 산다는 그의 말에 조금 홀가분한 기분이 들어, 그가 산다는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올랐다. 집에 들어서자 이미 뭔가 음식 준비를 해놓은 모양새다.


"형님, 오신다고 나름 후다닥 준비는 해봤는데, 입에 맞으실까 모르겠네요."


 중국집 배달음식도 아니고, 이게 다 뭔가 싶었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상위의 레인지에 불을 붙이고 있다. 반찬들 하며, 이미 단단히 준비를 한 차림새였다.


"제가 낚시를 좀 하러 다녀요! 지난번 고향 근처에서 잡은 쏘가리가 있길래 매운탕 좀 끊여  봤는데 괜찮으시죠?"


"어허! 괜찮다 뿐인가! 이거 졸지에 인사 없이 대접만 받게 되었네......, 쯧!"


"형님 하고 옛날에 동네어귀 식당에서 부대찌개 먹던 생각이 나서요! 뭔가 끓여드리고 싶더라고요!"


 붙임성 좋고, 말주변 좋은 그의 심성은 변함이 없었다. 하긴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는 나에게 사진첩 한 권을 내놓았다.


"얼마 전에 이걸 보니까 형님 생각이 나기에....., "


 나하고 있을 적에 그는 카메라 하나를 열심히 눌러댔던 기억이 났다. 취미가 생겼는지 인화도 열심히 해서 사진을 주고는 했었다. 나는 결혼 후 이사가 잦아서 그런 사진을 다 잃어버렸건만, 그는 오롯이 다 보관하고 있었다. 그 사진첩엔 내 이십 대 초. 중반의 모습이 살아있었다. 수송병과인 만큼 차량대 사이에서 사병들과의 모습, 간부들 회식 장면 등등 사진을 하나하나 보면서 나는 감회에 젖어들었다.


"아직 낮이긴 하지만 한 잔 하시죠!"


 음식이 다 되었는지 그는 나에게 권하며 잔을 내밀었다. 매운탕에 밥만 먹기는 좀 밍밍하다는 생각도 들어 그와 두어 잔 담금주를 마셨다. 갑자기 낯선 분위기가 예전으로 돌아간 듯, 그와의 대화가 편해졌다. 아들하나에 딸 둘이 있는데 모두 지방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터라 집에는 없다고 한다. 조심스럽게 그의 아내에 관해 물었다.


"죽었어요! 그렇게 나를 애달프게 하더니..., 후!"


 역시 괜한 말을 했구나 자책했지만, 안 물어볼 수도 없었다. 결혼 후, 그의 아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 출입을 했다고 한다. 의사가 병명이나 원인을 모르겠다고 하니, 그의 아내나 그는 초조하여 이곳저곳을 수소문하였던 것 같다. 그의 장모는 모든 게 집안 탓이라고 했단다. 할머니가 만신무당이니 격세유전의 운명이 그의 아내에게 닥친 거라고 말했다 한다. 이후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 방법을 찾으니 거부하지 말고, 신내림을 받아야 무탈히 결혼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아내는 강렬히 거부했으나 그럴수록 고통은 배가되어 도무지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자학을 하곤 했다고 한다.


 권중사는 아내에게 괜찮으니 장모님 뜻에 따르라고 했다. 그러니 몸은 편해졌지만 사람이 돌변하여 낭비벽이 심해졌다고 한다. 군인급여를 관리하는 중앙경리단을 통해 그에게 급여차압을 통보하니, 급하게 찾은 게 나였다고 했다.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줬어야 하는데, 괜한 자책감이 몰려왔다. 신내림을 받고 여느 가정주부처럼 살고자 했으나, 운명은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고 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 헛것을 보고, 그러다 이런저런 신당을 차리는데 필요한 무구들을 사들이더니, 아예 집을 나가고야 말았다고 한다.


 한동한 아내를 찾아 헤맨 끝에 양주의 어느 곳에서 아내를 발견했다고 했다. 아내는 퇴역무당인 만신집에 머물며 굿을 준비한다고 했다. 집으로 가자며 잡아끌었으나, 갈 수없다고 했다. 한동안 별거 아닌 별거 상태로 지내다가 1년이 지난 후, 홀연히 집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이번엔 또 다른 사람인양, 살림에 정성을 보이고 내조를 훌륭히 했다고 한다. 처음엔 내심 초조했지만, 아이도 낳고 여느 가정과 다름없이 행복했다고 했다. 이런 말을 하는 그의 눈가는 그렁해진 채, 겸연쩍은지 나의 술잔을 채운다. 십여 년간은 아무런 탈이 없었다고 했다. 아이들도 잘 자라주고, 아내도 이전의 기억은 모두 잊은 듯했다고 한다.


 아이들이 자라 중. 고등학생이 되었을 즈음, 아내가 아파서 몸져누웠다고 했다. 더럭 겁이 나 큰 병원으로 검사를 다녔으나 의사는 병명을 대지 못했다고 한다. 입원을 했으나 본격적인 치료를 하지 못하는 답답한 시간이 이어지고, 어느 날 퇴근하고 병실에 가니 딸들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부음을 알렸다고 한다. 장례식에서 그의 처형은 동생인 그의 아내에 대해 말해 주었다고 했다. 이전 가출했을 때 신당에서 일정기간 봉행을 하고, 영접은 끝내 거부했다고 한다. 무당으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지만, 남편과의 삶을 원했던 아내는 일 년 동안의 봉사로 십여 년의 기한을 얻어 그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취기에 그는 울고 있었다.


"처음에 사귈 적에....., 셋이 같이 잠을 잔 거 기억하시죠?"


"기억하지! 그래서 내가 냉큼 부대로 복귀했잖아!"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네요!......, 형님과 지낼 때가 참 좋았었는데..., "


 그의 지나온 세월이 만만치 않았을 만큼, 고통이 심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지나온 시간에 대한 후회가 없을까마는 회한이 짙어 보인다. 나 또한 올해 말에 정년이라고 했더니, 무얼 할 거냐고 묻는다. 아직은 정해진 게 없으니 천천히 생각하려 한다고 말했다. 퇴역을 앞둔 우리 둘은 여전히 '고도'를 기다리는 철부지 군인은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직도 살아갈 많은 날들이 있지만 여전히 어리숙하고, 여물지 못한 심성을 안고 나머지 생을 살아내야 한다. 그의 집을 나와 정류장을 나서는 나를 굳이 따라 나와 버스를 타고 떠날 때까지 배웅을 하는 그를 보며, 다시 보자 약속했지만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날의 석양은 내 젊은 추억 속 장소를 뒤로하며 유난히 붉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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