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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가화 Apr 15. 2024

어린 동거인

2003년생. 양띠. 

내 큰 아들과 동갑이다.

남자아이는 참 잘생겼고, 여자아이는 참 예쁘게도 생겼다.

둘이 지금 오피스텔에서 동거를 하고 있는데, 남자아이가 아파트에 꼭 살아보고 싶어 한다며 우리 부동산을 찾아왔었다.

보증금 천만 원에 월세 70만 원.

두 아이는 월세 70만 원 정도는 둘이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면 충분히 낼 수 있다며 계약을 했다.

보증금이 조금 부족하다며 보증금을 7백만 원으로 해줄 수 없냐는 실랑이부터, 우여곡절이 많은 계약이었다.


내 눈엔 마냥 어린아이 같은 우리 큰 아들도 양띠인데,

이 아이들도 너무 어린것이 아닌가? 아직 부모님의 보호가 필요한 나이가 아닌가? 내가 너무 내 아들을 어리게 보는 건가?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중고마켓에서 살림을 장만하며 설레어하는 아이들을 보니, '잘 살겠지. 내가 너무 꼰대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든다.



문제가 터지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입주하고 두세 달이 지났나?  집주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 어린 동거인들이 월세를 내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하냐는 질문이다.

"아... 보증금이 천만 원 밖에 안되어서, 채권확보가 어려운데 전화하셔서 독촉을 하셔야 될 듯해요. 한 달 월세를 못 내면 다음 달에 두 배가 되는데 월세 내기가 더 힘들지 싶은데요."


연이어, 세입자 여자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계약기간 다 못 채우고 나가면 벌금 내야 돼요?"

"엥? 벌금요? 그런 건 없어요. 다른 세입자를 찾아 주시고 나가면 돼요. 대신 중개수수료랑 다음 세입자 들어올 때까지의 관리비와 월세는 고객님이 내셔야 되고요."

"아하~!"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한 작은 탄성과 함께 끊어진 전화. 곧이어 대기하고 있었다는 듯 남자아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저... 이사를 가야 할 것 같은데요. 나중에 보증금을 돌려받을 땐 어떻게 해야 돼요? 계약자가 여자친구 이름으로 되어 있는데, 제가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나요?"

"아뇨. 계약자 명의의 계좌로 돈이 들어가야 해요."

"방법이 없을까요? 제가 돈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요. 보증금 천만 원 중에 7백만 원은 제 돈이거든요."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간절하다.

"음. 여자친구한테, 인감증명서 한 통 떼서 인감도장 들고 사무실로 한 번 들르라고 해주시겠어요? 보증금 잔금을 받는 권한을 위임한다는 위임장 하나 만들어 놓을게요."

"아... 감사합니다."

"근데... 갑자기 왜? 무슨 일 있어요? 이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오지랖 넓은 나의 질문에 남자아이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이야기한다.


"사실은요. 여친이 바람이 났어요. 정말 정말 화가 나요. 전 여기 이사 올 때 여자친구랑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꿈도 많았거든요. 휴..."

오죽 답답하고 화가 났으면 딱히 친분도 없는 부동산 아줌마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을까 싶었다.

어쨌든 바람피운 인간이 나쁜 인간이니 보증금 7백만 원은 꼭 원래주인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신경을 써야겠구나 하는 다짐도 해본다.


다행히 다음 세입자는 금방 구해졌고, 이사도 빨리 들어올 수 있다고 했다.

남자아이는 벌써 자기 짐을 챙겨서 본가로 들어갔고 여자아이 혼자 거기서 살고 있는 상황이다.

다음세입자가 들어오기 전에 여자아이가 인감증명서를 들고 오면 좋겠는데, 하루 이틀 자꾸 미루며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오늘 갈게요. 

내일 갈게요. 

가는 중이에요. 

그리곤 전화도 문자도 씹어버리는 굉장한 아이였다.

온갖 핑계와 거짓말을 밥 먹듯 쉴 새 없이, 끊임없이 하는 여자아이에게 질려갈 때쯤, 여자 아이는 오래되어 보이는 외제차에서 폼나게 내리며 인감증명서를 달랑거리며 사무실로 들고 들어왔다.

여자아이의 얼굴이 처음 봤을 때의 얼굴이 아닌 것 같다.

저 외제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새로 생긴 남자 친구인가 보네. 

"이삿날이 다 되어가는데, 준비는 하고 있어요? 이삿짐 다 빼야 보증금을 받을 수 있는 건 아시죠?"

"거의 다 팔고 집에 남아있는 물건이 없어요. 걱정 마세요."

"네네. 당일 오전 12시까지 관리비 정산 하시고 키 들고 사무실 오시면 집주인께서 보증금 반환하실 거예요.

7백만 원은 남자친구에게 3백만 원을 고객님께 보내면 되죠?"

"넹~" 하며 나가는 여자아이가 왜 그리도 밉살스럽게 보이는지. 


이삿날.

나는 서울에 볼 일이 있어 사무실을 지킬 수가 없었고, 실장님이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싸늘하다. 뭔가 찝찝하다.


아니나 다를까.

대책 없는 그 여자아이는 짐을 빼지 않았다.


중고로 다 팔아서 없다던 살림은 그대로 집을 채우고 있었고, 입던 속옷이 나뒹구는 현장.

발코니마다 시커먼  곰팡이를 애지 중지 곱게도 참 많이도 키워 놓았다.

그리고는 아주 떳떳하게 보증금을 내어 놓으라는 여자아이와 새로 생긴 그녀의 남자친구.


새로 이사 올 사람들이 섭외한 입주청소 업체는 갸우뚱하며 발길을 돌렸고, 새 세입자는 입주청소 계약금을 날렸다.


"이삿짐은 오늘 중으로 빼면 되는 거 아니에요? 돈 주세요!"

짐을 다 빼야 보증금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다며, 오늘 중으로 짐을 뺄 테니 돈부터 내어 놓으라고 한다며 실장님이 다급한 목소리로 나에게 전화를 한다.


"실장아. 일단 비밀번호랑, 현관 카드키부터 받아놓고, 짐부터 뺄 수 있도록 해. 무조건 오늘 중으로 빼야 하니까. 다행히 새 임차인이 내일 이사 들어온다고 하니 밤늦게라도 청소해 줄 수 있는 업체 한 번 찾아보고..."


"이삿짐 빼야 보증금 받을 수 있다는 소장님이 이야기 여러 번 하셨다는데요?"

실장님의 질문에 여자아이는 그런 이야기 들어본 적도 없고, 한 적도 없단다.  

"일단, 이삿짐을 빼기 전엔 보증금 못 내어 드리고, 다음 세입자가 날린 청소업체 계약금과, 발코니 특수 청소비까지 다 제하고 보증금 주실 거예요. 짐부터 빼셔요"

"싫은데? 왜? 내가 왜요?"

눈을 희끄레 뜨고 반말을 반쯤 섞어서 실장님을 보며 말하는 그 양띠 여자아이를 보며, 실장님은 초인적인 인내심을 짜내어 웃으며 답했다고 한다.

"그럼 보증금 못 받아요. 하하"

자기가 부담한 3백만 원에서 월세 밀린 것, 중개수수료, 손해배상금액까지 빼면 찾아갈 돈도 얼마 안 될 것 같다.

돈 내어 놓으라고 박박 우기던 여자아이는 새로 생긴 남자 친구까지 불러서 실장님을 협박했다고 한다.


 " 짐부터 빼시라고요! 그래야 집주인이 돈을 주시죠."


보통이면 오전 11시경에 짐이 빠지고 청소가 들어가야 하는데, 5시가 되어서야 입주청소를 시작할 수 있었다.

집주인은 실장님의 조언대로 입주청소 계약금 날린 것과, 특수 청소비 30만 원을 제하고 남은 보증금을 입금해 주었는데 그때부터 실장님의 전화통은 난리가 났다고 한다. 새로 생긴 그 남자친구라는 아이가 실장님께 전화를 해선 온갖 욕설과 고성으로 괴롭혔나 보다.

                                                 

  "전화 차단해."


나의 조언에 실장님은 그 남자아이의 전화를 차단해 버렸고, 밤늦은 시간 열심히 귀향하고 있는 나의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한다.

자신을 여자애의 아버지라 거짓으로 소개하며, 왜 보증금을 다 돌려주지 않느냐고 묻는 새 남자친구.

"아~. 아버님이세요?

따님한테 물어보시죠. 제가 따님한테 열 번도 넘게 짐을 다 빼야 보증금을 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했고, 따님은 그때마다 짐 다 빼고 없다고 저한테 이야기했었는데요. 옆에 있죠? 한 번 물어보세요.

그리고, 처음 입주할 때 찍어 놓은 집 동영상을 따님의 이전 남자친구가 보내줘서 받았는데 지금 현장이랑 비교해 보시면 왜 청소비를 청구하는지 이해가 되실 겁니다. 동영상 보내드릴게요. 하나 더. 다행히 새로 이사 오는 세입자가 내일 이사를 들어오길 망정이지 오늘 이삿짐 차가 들어왔으면 입주청소계약금 10만 원이 아니라 이사비용 2백만 원 부담하실 뻔했어요"

그러자 꼬리를 내리며 청소비가 과하게 청구된 것 같으니 절반이라도 돌려주며 안되냐는 참으로 구질구질한 부탁을 하는 여자아이의 아버지. 아니 새 남자 친구.  

"집주인에게 여쭤볼 테니 기다리세요. 제가 지금 운전 중이라 통화를 길게 하기 어렵습니다."


 그 여자아이 주변엔 조언을 해주는 어른이 한 명도 없는건가?


나를 꼰대라고 칭하면 어쩔수 없다만, 살아온 기억을 더듬어 보거나 아들의 상태를 보면 이제 20살을 넘긴 사람은, 법적으로는 성인이지만 사실 어린아이인데 무슨 사리판단을 수 있을까?!

나이가 40을 넘기고 50이 다 되어도 세상엔 모르는 것 투성이고,

언제나 미숙하다고 느끼는 것이 사람인데, 저 어린 동거인들은 참으로 거침없이 삶을 사는 것 같다.

내가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는건진 모르겠으나, 세상은 항상 외줄타듯 불안정하게 돌아가는것만 같은데 저렇게 막살아버리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은 건가?


모르니 용감한 것이겠지. 

끝까지 알고자 하지 않을 거니, 닥치는 대로 거짓말하고, 사람들을 기만하며 본능이 이끄는대로 살테니 죽는 날까지 행복할지도.


여튼 양띠 소년아. 잘 헤어졌다.

아줌마가 중학생이던 시절에  어떤 선생님이 그러시더구나.

먹을 가까이 하는 자 검어지고, 인주를 가까이 하는 자 붉게 물든다고.

그리고 이 말씀도 하셨지.

모진년 옆에 있으면 같이 벼락 맞는다.

20대는 아직도 어리고 뇌가 말랑말랑해서 어떤 가치관도 비판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나이라고 생각해.

타고나길 원칙과 도덕성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면.. 물드니까... 그러니까,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말을 하는 사람들 속에 머물길 권한다.

그것이 어렵다면, 도서관에 처박혀 책을 읽는 방법도 있다.

꼰대 아줌마의 허접한 충고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지만, 반 백년 가까이 살아본 자의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니 새겨 듣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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