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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가화 Sep 03. 2024

지방법원에서 등기가 왔대.

범사에 감사. 일상이 기적

오늘은 일찍 퇴근을 해서 우리 집 고양이 끌어안고 한숨 자야겠어. 내가 없는 사무실은 우리 실장님이 잘 지켜 주실 거야!!!


손님도 없고 점심을 먹고니니 나른해져서 집으로 간다.

자영업의 장점이 뭐겠어. 쉬고 싶을 때 쉬는 거지.

이럴 땐 나의 직업이 너무 마음에 들어. 돈을 열심히 벌어야 한다는 부담감만 제어할 수  있다면 이만큼 좋은 직업도 없지 싶어. 하!


어...

집 현관에 우체부 아저씨가 스티커를 이쁘게 붙여놓고 가셨네.

어디 보자..

나한테 등기가 왔는데, 내가 없는 관계로 도로 들고 가신다네. 필요하면 오후 3시 넘어서 우체국에 직접, 오시든지..,.


등기?  등기 올 것 없는데?!

누가 보냈지?

응?

헉!

뭐야.


       보낸 사람: 지방법원!!!


순간 심장이 나대기 시작한다.

법원에서, 왜?!

내가 뭘,, 어쨌다고?


떨리는 손으로 우체부 아저씨께 전활 했다.

"저... 지금 어디 계셔요? 제가 등기를 못 받았는데요. 3시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요.

지금 계신 곳으로 찾으러 갈게요"

 "아. 그러실래요? 땡땡 아파트 맞은편 편의점 앞으로 오시면 드릴게요"

네네. 10분 안에 갈게요.


운전을 하는 십여 분동 안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운다.

누군가 나한테 앙심을 품고 민사소송을   걸었나?

누구지? 대충 용의자도 추려본다.

에이 설마.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소송까지. 그럴 사람들 아닌데?

혹시 그런 거라면 무고로 맞고소를 해야 하나?

남편에겐 언제 알리지?,


부정적인 생각과 나쁜 상상은 딱히 공을 들이지 않아도 무한대로 부풀어 오른다.  이렇게 부풀고 부풀다가 내가 "펑!" 터져버릴지도.. 모르겠다.


우체부 아저씨를 만나 신분증을 보여드리고 떨리는 마음을 누르고 우편물을 받았다.

겉, 표지에 떡 하니 적혀있는

전! 자! 소! 송!


무서운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얼굴의 실핏줄을 타고 흐르던 피가 발끝으로 쭈욱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차로 와서 봉투를 거칠게 뜯어본다.

내가 뭘 그리 잘못한 게 있다고, 소송씩이나 거는 넌 도대체 누구냐!


사건  2024카확 12345678  소송부담확정

신청인  **건설  대표이사 김 OO

피신청인 ;  별지 1  피신청인 목록 기재와 같음.


별지를 보니 내 이름을 포함한 2백 명이 넘는 피신청인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다.

맥이... 맥이.

탁 풀린다.


한 2년 전쯤이었나?

투자로 사두었던 작은 아파트가 있었는데, 하자소송을 하겠다며 나선 법무 법인이 있었다.

분양받은 사람들은 소송에 진다고 해도 아무런 손해가 없으며, 반드시 이겨서 보상금을 받게 해 줄 테니 소송위임을 위해 관리사무소로 얼른 오라는 전화를 줄기차게 했더랬지.

철석같이 믿었지. 소송에 져도 소송비는 즤들 법무법인이 낼 거니 아무 걱정 하지 말라는 말을.


근데 이건 뭐야?

내용인즉슨 소송비를 피신청인 2백여 명 남짓한 사람들이 N빵 해서 내라는 것 같은데?

금액도 인당 9만 몇 천 원이라고 적혀 있잖애?

이런 사기꾼들을 보았나?

아파트 하자소송 때문에 분양자들 소송비 내라고 하는 건 도대체 어느 나라 이야기야?!!!


그날저녁 소송을 맡았던 법무 법인에서 단체 문자가 왔다.

1차 소송을 취하하고 민형사로 소송하기 위한 진행과정이니 믿고 기다려 달란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날 나는 얄궂은 법무법인에 기망당한 것 같은  불쾌감 보다  내가 펼치던 불행의 상상의 나래가 진짜 쓸데없는 걱정이었다는 안도감이 훨씬 컸다.

오래전 내 카톡 프사에 적어두었던 상태 메시지도 생각나고


                                     범사에 감사. 일상이 기적.


아무 일 없이 권태로운  하루하루들이 얼마나 행복한 날들인지 다시금 깨닫는 시간.

그리고 또 내면 깊숙이 숨어있는 나의 정체성도 다시 확인한 날이다.

세상에 둘도 없는 쫄보.

괜찮은 척. 평화로운 척. 의연한 척. 여유로운 척. 아는 척 하지만 알고 보면 마른행주를 쥐어짜듯 용기를 쥐어짜 내며 살아가는 겁보. (그래도 장하다. 용기를 쥐어짜 내는 나 자신이)


오늘 하루. 별일 없이 지루했고, 가끔 가까운 이 가 티껍게 느껴지기도 하고 먹고 싶은 글루텐 빵빵 들어간 빵을 살찔까 봐 먹지 않는 이 하루가 기적같이 아름다운 날이다. 잊지 말자.





"자기야 자기야  오늘 법원에서 등기가 왔다는 거야.

그때부터 손이 발발발. 심장이 발발발.."


"자기. 뭐 죄지은 거 있어?"


"아니. 아니. 죄지은 거도 없는데 법원에서 왔다니까

손이 발발발. 심장이 발발발 떨리는 거야.

건설회사 하자소송 때문에 온 거더라고.

근데 그것도 모르고 손이 발발 바아알..."


"으응~. 알았어. 알았어요. 밥 잡솨요~"


"그니깐.,, 내가

손이...  발발바알...."


크크크 놀랬다고.

깜짝 놀랬다고. 큭 큭 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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