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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미 Oct 18. 2020

삿포로 1

4월 이야기 



  요즘 날씨가 참 내가 경험한 삿포로 같다. 아침저녁으로 바람도 꽤 불고 쌀쌀하지만 그늘 밖은 햇살이 쨍쨍하니 봄과 여름 사이의 느낌도 난다. 일찍 나가서 늦게 들어오면 그 사이에 겨울 ~ 가을 ~ 여름 ~ 봄 ~ 다시 겨울 날씨를 경험할 수 있다. 하루에 사계절이 다 느껴지니 옷 입기도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고 잘못하면 햇빛에 눈을 찌푸리지만 그래도 기분은 참 좋다. 

  2018년에 다녀온 삿포로 여행은 참 짧지만 임팩트 있었다. 생각해보면 2018년이 나에게 참 다이나믹 했었다. 

졸업을 유예하고(또!), 동네 영어 학원에서 강사 아르바이트를 하며 밤낮을 바꿔 살기도 하고, 영화제에서 근무하며 나름 자랑할만한 게스트 초청에도 성공하고, 졸업도 하고, 취뽀 아닌 취뽀도 하고. 취뽀란 단어는 참 귀여운데 실상은 그렇지 않으니 여기서 또 한국인 특유의 해학의 정서가 느껴진다. 어쨌든 여러모로 참 다이나믹한 한 해였고 그 안에 삿포로 여행이 있었다.


  뜨거운 8월의 테헤란로를 아침저녁으로 오고 가며 치킨을 너무 먹어서 내가 드디어 계란후라이로 익어가는 건가 착각하고, '야 이게 현실이냐. 내가 오늘 8월 21일 저녁 7시 10분에 삼성역에 있는데, 내년 8월 21일이 평일이면 그때 이 시간에도 여기 있는 건가? 내후년에도? 이 회사가 정상이라면 최소 3번의 8월 21일의 7시 10분을 삼성역 5-3 칸 앞에서 보내지 않을까? 이야.. 내가 이런 삶을 살다니... 이것이 현실의 무게인가! 스크린 도어가 없었다면 정말 저 3번의 8월 21일 중 하루는 들어오는 저 전철에 내 몸을 던질지도 모른다.'라며 지루하지만 무시무시하며 대부분의 직장인이 할 생각을 해버렸다. 그렇게 상념에 젖어 있을 때 마침 돌아오는 금요일이 졸업식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다음은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삿포로에 가는 수밖에.. 

  삿포로가 졸업여행으로 선정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아무 연고가 없을 것

   혼자 묵언 수행을 하면서, 나의 대학 생활을 돌아보고 앞으로 다가올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준비하고 싶었다.

2. 가까울 것 

  출근 일주일 만에 금요일 연차를 쓰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다. 반드시 주말 안에 여행을 끝나고 와야 한다. 

  나에게는 단 하루의 땅겨 쓰는 연차만 있을 뿐이었다. 

3. 시원한 날씨 

  더운 거 싫어. 여름 싫어. 

  위 세 가지 조건에 맞춰 집에 가는 길 내내 항공권 조회를 해보니 삿포로가 나왔다. 숙소를 알아보니 새로 생긴 호텔 겸 호스텔에서 도미토리 침대 한 칸을 예약하니 그 값도 매우 저렴했다. 나도 모르게 숙소를 예약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어쩔 수 없이 2일 전 여행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시원하게 삿포로 맥주와 후라노 와인과 초밥 그리고 질 좋은 우니나 잔뜩 먹고 오리라. 

  첫날은 이 사진 밖 이야기니까 나중에 풀어보고, 일단 이 사진 이름은 "초밥에게 가는 길"이다. 

비록 급하게 준비했을지언정 오랜만에 홀로 여행에 나름 졸업 여행이니 그 계획이 적잖이 창대했다. 하지만 준비한 게 많을수록 우당탕 쿠당탕하는 법. 정말 웃긴 일화가 있는데 이건 다음 사진에, 하여튼 일본! 그것도 미스터 초밥왕(의 배경지 근처)의 도시에 왔으니 초밥을 먹어야 한다며 눈 뜨자마자 달려온 시내에 위치한 시장으로 가는 길이다. 잘 안 보이지만 이 아름다운 길 끝에서 왼쪽에 위치한 파란색 지붕의 건물이 수산시장이다. 도쿄의 츠키지와는 사뭇 다른 차분한 수산시장이었다. 보시다시피 푸르른 잎을 반짝이는 햇살이 참 좋았고, 보이지 않지만 꿉꿉하게 찌지 않고 선선하게 부는 바람이 정말 좋았다. 걷는 내내 발가락까지 뻗어가는 활력이 느껴졌다. 게다가 이 길의 끝에는 맛있는 초밥이 날 기다리고 있으니 당연히 세상이 아름다워 보일 수밖에.

  생각해보면 연필을 처음 잡고 학습지 따위를 풀어 재끼는 순간부터 나에게 수능은 연중 가장 중요한 날이었다. 못해도 10년을 매년 11월의 그 목요일을 세며 보냈다. 물론 대학 입학 이후에는 힘들었지만 좋았던 추억의 날 또는 언어 시험 치고 배고파서 도시락 까먹고 싶었던 날 정도가 되었고, 대학 졸업까지 한 뒤에는 그나마 벚꽃이 떨어지는 걸 보니 중간고사구나 정도 생각할 뿐이다. 수능도 팀플도 종강도 다 희미하다. 그런데 유독 삿포로에서는 지나온 학창 시절에 대한 생각이 참 많이 들었다. 회사를 일주일 출근했다고 그런 건지, 졸업여행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 어쩐지 삿포로를 걸어 다녔던 참 짧았던 이틀 동안 '마무리'에 대해 생각들이 계속 떠올랐다. 그때 내가 좀 더 부지런했다면 그 생각들로 '걷는 인간, 정지숙' 같은 책을 썼을 지도 모른다. 이것 참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삿포로를 걷던 나라면 기깔나게 마무리했을 것 같은데 사무실에 너무 오래 갇혀있었나 시원한 마무리 문장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래도 깔끔한 마무리를 위해 삿포로에 다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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