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간의 고시 생활을 정리하고 도망치듯 유럽여행을 시작했다. 고시는 포기하고 책들은 정리했지만, 마음의 불안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정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낯선 곳을 여행하는 것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그래서인지 유럽여행들 초반의 내 사진은 단 한컷도 웃고 있지 않다. 자존감이 회복되고, 나를 다시 사랑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간 유럽 여행은 매일 세끼의 끼니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대형마트부터 찾아 1유로짜리 대형 빵을 가방에 담고 또 1유로짜리 과일 한 바구니를 구매하면 며칠을 배부르게 먹었다. 스위스에 도착한 그날도 그랬다. 큰 빵과 납작 복숭아를 사서 쉴튼호른에 가기 위한 기차를 탔다. 기차에 내려서는 케이블카를 타고 가야 하는데 그 비용이 만만찮게 느껴졌다. '휴 돈 쓰지 말고 걍 걷자'라는 생각으로 준비 없이 무작정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지금에서 돌아보면 여자 혼자 별다른 준비 없이 그 높은 산을 오르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한지 간담이 서늘하지만 그 당시에는 스스로를 별로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시작된 산행은 총 10시간이 걸렸다.
19km가 얼마나 먼 거리인지 이땐 몰랐다...;;
첫 한 시간은 아무 생각 없이 바쁘게 걷기만 했다. 머릿속에 빨리 올라가자는 생각뿐이었다. 점점 지치고 피곤해지자 잠시 앉아서 쉬어야지 싶어 주변 벤치에 앉았다. 그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혔다. 벤치 앞으로 펼쳐진 장관에 입이 딱 벌어졌다. 내 눈앞에 구름이 떠 있고 아래로는 아기자기한 마을들, 위로는 설경이 펼쳐져 있었다.
벤치에 앉아 바라봤던 장관
난 스위스까지 와서 도대체 뭘 보면서 걷고 있는 거야...?
아름답기로 유명한 이 곳에 와서 나는 바닥만 바라보며 정상에 오르기 바빠 스위스의 절경들을 놓치고 있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혜민스님 이슈로 이 책을 언급하기 싫었지만... 이것보다 더 상황에 들어맞는 책이 생각나지 않는다ㅠ)처럼 걷기를 멈추니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놓치고 있던 것들이. 무엇인가 준비하고 나아가야 한다는 조급함에 방향은 고민하지 않은 채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지나온 대학 시절이 파노라마처럼 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시험에 떨어지고 난 후에는 패배감과 좌절감의 늪에 빠져 내 안의 가능성은 전혀 보지 못하고 스스로를 비난하기에만 급급한 모습을 비로소 발견했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난 괜찮은 사람, 나는 나 스스로에게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등산을 할 때 산을 어느 정도 올라야 아래가 보이듯, 나도 나를 돌아보고 다시 사랑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잠시 쉬고 다시 오른 길은 지금까지 걷던 길과 달랐다. 길가의 작은 풀꽃, 등산객들이 표시해놓은 화살표 하나하나가 새롭고 행복하게 다가왔다. 지금 이 순간 이 곳에 와 있다는 사실이 벅차오르게 기뻤다. 왕복 6시간이면 충분했을 산행길은 휴식과 셀카 시간,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더 해져 10시간이 걸렸다. 10시간 산행이라면 당연히 힘들었을 그 기억은 9년이 지난 지금에도 너무나 행복했던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언제든 마음이 조급해지고, 남과의 비교로 자존감이 낮아질 때면 나는 그 기억을 꺼내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