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해관계 속에서 약속을 하고 산다. 그 약속을 성실히 지키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약속은 깨기 위해서 한다는 식으로 가볍게 여기는 사람도 있다. 일리아스 3권에서 보여주는 맹약은 9년간 전쟁을 치르며 지친 전우들에게 단비와 같은 약속이었다.
전쟁의 당사자들인 헬레네의 전 남편 메넬라오스와 현재 남편 파리스의 일대일 결투를 시작하기 전에 약속을 맺는다. 트로이아 왕 프리아모스가 맹약의 증인으로 참석한다. 맹약의 내용은 이러하다.
“만약 알렉산드로스가 메넬라오스를 죽이거든 그가 헬레네와 그녀의 모든 보물을 차지하게 하소서. 우리는 바다를 여행하는 함선들을 타고 떠나겠나이다. 그러나 만약 금발의 메넬라오스가 엘렉산드로스를 죽이거든 그때는 트로이아 인들이 헬레네와 그녀의 모든 보물을 돌려주고 후세에까지 길이 남을 적절한 보상금을 아르고스인들에게 지불하게 하소서.”
두 주인공은 넓은 들판 한가운데 그리스 군과 트로이아 군 전체가 지켜보는 가운데 결투를 시작한다. 지켜보는 백성들의 마음은 어떻게든 이번 싸움에서 판가름이 나서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이데 산에서 다스리시는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위대하신 아버지 제우스여! 둘 중에 누가 이런 고난을 양쪽 백성들에게 가져왔든 그자는 죽어서 하데스의 집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우리에게는 우의와 굳은 맹약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파리스의 그림자도 긴 창이 아트레우스의 아들의 둥근 방패를 맞추는 것으로 결투는 시작되고 모두가 숨죽여 그들을 지켜본다. 메넬라오스가 파리스의 투구를 내리쳤다. 그리고 그의 투구 말총 장식을 거머쥐고 아카이오이족 진영으로 끌고 갔다. 하지만 황금사과의 주인이 된 아프로디테가 그렇게 순순히 파리스를 끌려가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여신은 끌려가는 투구의 끈을 끊어버리고 그를 짙은 안개로 감싸 성탑 위로 데려가 버렸다.
맹약은 깨져버린 것이다. 결투를 하다가 결투의 상대가 사라진 것에 메넬라오스는 망연자실했을 것이고 분노했을 것이다.
목숨을 건 결투에서 벗어난 파리스의 행동은 상식을 초월하는 행동을 보였다.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전쟁의 원인이 된 헬레네를 불러서 사랑을 나누는 것이었다. 밖에서는 분노한 메넬라오스가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파리스는 맹약을 어긴 것에 대한 책임감도 느끼지 못한다. 수많은 그리스 군과 트로이아 군은 전쟁이 끝나기를 열망하며 관전하고 있었다는 것도 헤아리지 않는다. 그 순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사랑하는 헬레네를 품고 싶다는 생각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양심도 없는 파렴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여신의 도움으로 도망친 파리스의 입장에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하나의 해석을 찾아냈다.
그의 상상을 초월한 행동은 또 다른 인간의 본능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은 매일이 전쟁이고 매일이 결투의 나날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전쟁과 별반 다르지 않다. 무사히 하루를 잘 버티고 견뎌낸 자신에게, 때로는 어려운 일을 완성한 자신에게 가벼운 맥주 한 잔 기울이며 잘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저녁이 어쩜 우리들 마음속의 또 다른 본능인 것처럼 말이다. 간혹 생각했던 일들이 잘 해결되지 않고, 스스로 못난 행동을 해서 깊은 동굴 속으로 숨어 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혼자 있기보다 누군가가 다가와 위로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위로받고 내가 치유되길 바란다.
맹약을 깨뜨리고 도망은 쳤지만 헬레네의 위로를 받고 싶었던 파리스를 그렇게 이해해보기로 했다. 간혹 무너질 듯 힘든 상처를 안고 돌아온 우리의 삶 속에서 그런 위로의 대상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이 배우자가 되든, 친구가 되든, 반려식물이 되든 어떤 것이라도 나를 위로해줄 대상이 필요하다. 내 마음을 위로해줄 대상이 하나라도 있는 사람은 또다시 심기일전하여 다음날 눈을 뜨면 심기일전하여 일상의 전투장소로 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