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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뀨언 Jul 06. 2020

존재와 필연적 폭력의 고리

한강 <채식주의자>, 창비

반쪽짜리 채식주의자가 리뷰하는 한강의 채식주의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태도는 태연했다. 마치
'옷을 입는 것보단 벗는 게 자연스럽잖아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채식주의자

존재가 가질 수 있는 권리

    무엇을 먹는지 어떻게 사는지, 모든 '조건'이 그가 찾는 평범한 여성에서 부합해서 아내를 '선택'한 주인공. 그러나 그는 아내가 그의 선택의 기준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자 정신적 일탈로 간주한다. 그녀가 왜 그 선택을 했는지 이유 따위 그는 궁금하지 않다. 그저 평범에서 벗어나는 아내가 불만족스러울 뿐이다. 그와 그녀는 철저히 권력관계에 있다. 그가 그녀를 '선택'했다. 이 관계에는 분명한 위계가 존재한다.

    영혜는 핏빛 꿈을 꾼다. 그 피는 그녀의 것인지 그녀가 죽인 무언가의 것인지 혼란스러워한다. 자신의 존엄을 부정당하는 것을 꿈에서 인지하는 듯하다. 그녀가 죽이는 고기와 아내이자 딸인 자신. 고기를, 육신을 제공할 수밖에 없는 나약함과 선택은 계속 무시받고 외면당하는 그 순간을 인지한다.

    그녀는 육식을 하지 않고 정신이 원하는 대로의 삶의 방식으로 공존을 원할 뿐인데, 모두가 그녀의 선택을 그저 부정하려고만 한다. 잘못된 것으로만 간주한다. 가족에게조차 존재를 부정당한 그녀는 극단적인... 그저 그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강력한 의사 표현을 한다. 그녀는 분명히 병들어있었고, 그 원인은 존재를 부정당함이었다.

    자신을 일반인으로 간주하는 '보통의 잡식인'에게 채식은 죄다. 영혜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몽고반점

행위와 인간의 시선의 투영

    그는 영혜의 전 남편이 영혜를 대하는 태도에 당혹했다. 이 미묘한 인간으로서 존중하지 않음의 순간들을 포착한 그이기 때문에 영혜는 그저 내버려 두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어린 아이에게 있는 몽고반점이 성인인 처제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그가 느끼는 추악한 욕망의 실체는 무엇일까. 육신이란 무엇일까. 그는 무엇인지 모를 욕망에 휩싸여 여체로써 처제를 탐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결국 그 감정을 확인하고 싶어 그의 내면에 은밀히 숨겨두었던 작업의 모델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한다. 그는 그의 욕망을 스스로 더럽고 역겨운 것으로 생각하고 자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자신을 증오한다. 그렇게 작업은 시작되고, 예상과는 달리 그는 그녀에게 일말의 욕정도 느끼지 않고 작업을 마친다. 그리고 내가 본 작업 후 그녀는 마치 해방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가 스스로를 미쳤다고 생각했기에 그녀를 판단하려 들지 않았던 것 때문일까? 욕망을 품었지만 동시에 그녀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녀를 동등한 존재로 여겨주었음을 느껴서였을까?

    영혜는 마치 빈 유리병처럼 투명하게 그렇게 존재한다.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있음을 인지하면서. 그곳에 욕망이 들어온다. 인간이 만든 가부장제 가족의 프레임 안에서 그와 그녀는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그저 본다면 지극히 동물적 본능에 의한 행위, 한 겹 그의 변명을 씌워 본다면 예술적 행위, 사회의 틀 안에서 본다면 정신병을 앓고 있는 처제를 범한 변태적 불륜 행위. 행위란 무엇인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제도란 틀이란 기준이란 누가 정하는가...... 작가는 이것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으며, 나는 어떤 것을 받아들여야 할까 혼란스럽다. 이곳에서 피해자는 누구이며 가해자는 누구이며 범죄는 어떻게 성립하는가.


나무 불꽃

처형, 언니, 맏딸, 엄마. 인혜

    연작은 투영과 시선으로 풀어진다. 채식주의자는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평범한' 사회의 일원인 영혜 남편의 시선에서, 몽고반점에서는 영혜를 사물에 자신을 투영하지 않을 만큼 내면에 강한 창작의 집착이 있는 남성의 시선에서, 마지막 나무 불꽃에서는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사회의 피해자인 언니의 시선에서 진행된다.

평범함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헌신한 인혜는 깨닫는다. 끝없는 폭력의 주체이자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한 실현 가능한 방법이 죽음임을 영혜와 인혜 모두 알고 있었다. 책임감에 갇혀서 살아갈 뿐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인혜는 생각한다. 그녀와 남편, 그들은 정말 사랑했을까? 서로에게 무엇을 바라서 결합한 관계였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아서 비틀린 것일까. 평범한 가정이 되기 위해 그들이 바랬던 것은 무엇이고 비난받을 쪽은 어디에 있을까.

    최소한의 책임감으로 인혜는 영혜를 정신병원에 의탁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가장 근본적인 존재의 권리인 죽음까지 빼앗긴 영혜는 식음을 전폐한다. 영혜는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영혜는 채식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영혜는 먹지 않으려 하는 것이 아니다. 영혜는 그저 끊임없이 피해자 혹은 가해자로서 놓여야 하는 삶을 끝내려 할 뿐이다.


그것이 어떤 꿈이냐고 나는 묻지 않았다. 내가 들어가 보지 못한, 알 길 없는, 알고 싶지 않은 꿈과 고통 속에서 그녀는 계속 야위어갔다. p.25
'그런 것들도 하나의 질환일 뿐이지, 흠이 아니야'라고 얘기하고 다녔다 한들 어디까지나 남의 일에 한해서였다.  p.26
나는 아내가 '죄송해요, 아버지. 하지만 못 먹겠어요.'라고 대답하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죄송하지 않은 듯한 말투로 담담히 말했다. "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p.48
그가 거짓이라 여겨 미워했던 것들, 숱한 광고와 드라마, 뉴스, 정치인의 얼굴들, 무너지는 다리와 백화점, 노숙자와 난치병에 걸린 아이들의 눈물 들을 인상적으로 편집해 음악과 그래픽 자막을 넣었던 작품이었다. 그는 문득 구역질이 났는데, 그 이미지들에 대한 미움과 환멸과 고통을 느꼈던, 동시에 그 감정들의 밑바닥을 직시해내기 위해 밤낮으로 씨름했던 작업의 순간들이 일종의 폭력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을 다룰 수 있었을 때 그는 충분히 그것들을 미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p.83
그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그의 동서가 마치 망가진 시계나 가전제품을 버리는 것처럼 당연한 태도록 처제를 버리고자 했다는 것이었다. p.86
마치 정상적인 여자 같았다. 아니, 실제로 정상적인 여자야. 그는 생각했다. 미친 건 내 쪽이지. p.111
그녀의 태도는 태연했다. 마치 '옷을 입는 것보단 벗는 게 자연스럽잖아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p.125
환자인가, 보호자인가? 어디 이상한 구석은 없나. 의심과 경계, 혐오와 호기심이 얽힌 그들의 시선을 그녀는 익숙하게 외면한다. p.152
그녀가 간절히 쉬게 해주고 싶었던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p.161
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 p.191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음. p.192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 전의 어린 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p.197


존재의 본질과 다양한 폭력의 형태

    이 책이 집에 있었던 건 꽤 된 일이다. 책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반년 전, 그러니까 내가 일부 육류를 먹지 않기로 다짐한 이후부터다. 책 제목의 채식주의자는 어떤 의미이며, 이 소설의 무엇이 사람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을까 궁금했다. 몇 년 만에 만난 손에서 놓으면 다시 돌아가고 싶은 흡입력 있는 소설이었다.

    나는 비건은 아니지만, 네 발 동물의 고기, 내장과 뼈를 먹지 않는 폴로 지향 채식을 하고 있다. 내 절친한 친구는 비건이다. 그녀는 나에게 항상 채식의 좋은 점을 설명했었다. 이제는 안다. 비건인이 잡식 주의자에게 다가가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자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어선은 채식의 이점을 알리는 것이다. 우리가 꽤나 친해졌을 때, 그녀는 조심스럽게 나에게 한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추천해 주었다. 그것은 가히 충격적이었어서, 난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 생각났다. 내가 무시했던 내 식탁이 어떻게 꾸려지는가에 대한 진실을... 결국 나는 뭐라도 행동하지 않으면 나 자신이 싫어지는 지경에 다다랐고 결국 고기를 먹지 않기로 결심했다. 다소 과격할지도 모르나, 현재 육식에 대한 나의 시선은 이렇다. 현대에서 육식이란 철저한 권력관계에서 나오는 행위이며, 육식 그 자체로도 잘못된 착취의 고리에 동조하는 것이다. 과거에도 인간은 수렵을 했다!라는 반문, 그렇다. 그러나 그때는 무리를 지어서 필요한 만큼만 사냥하거나 길렀다. 수렵에는 항상 생명의 위협이 따랐고, 방목이나 유목은 자연의 생태를 존중하며 이루어진 형태였다. 그러나 현대는? 소를 빨리 자라게 하는 성장촉진제를 놓고 기름진 살코기를 얻기 위해 움직임을 극도로 제한하고 풀이 아닌 곡류 사료를 택해 먹인다. 심지어 몇 주 전 본 뉴스에서는.. 기이하게 큰 '슈퍼한우'를 기르는 농가에 대한 칭찬 기사가 나왔다. 내 식탁에 얹어지는 스테이크 한 덩이는 굶어 죽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야 할 식량을 먹는 소의 살이다. 자본가들이 만들어준 육식의 길엔 평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는 생태공동체 속 동등한 관계가 아닌 고깃덩어리 제공 물품이 되고, 어떤 인간동물은 자기가 먹을 수 있는 것을 소에게 뺏기는 격이다... 그렇다면 내가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그 몫은 다시 필요한 곳에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나 혼자라도 그 착취의 고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으로 육식을 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생태공동체 안에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과 되도록이면 건강한 관계를 맺고 싶다.

    책 속의 영혜는 다시 말하지만 채식주의자가 되기를 결심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주변의 시선으로 그녀의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단어가 '채식주의자'였을 뿐이다. 채식주의자는 채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책이 아니다.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과 희생을 묘사한다. 결국 영혜가 육식하지 않음은 인간적 권리의 확장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 사이의 권력관계에서 나오는 폭력을 해소하고자 함이었다.

    

    다큐멘터리는 넷플릭스에서 감상하실 수 있는, 카우스피라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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