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성이 Nov 09. 2022

<책리뷰> 모두 다 예쁜 말들

그럼에도 뚜벅뚜벅 가야 하는 길

< 모두 다 예쁜 말들 >은 1992년 출간된 코맥 매카시의 작품으로 그의 국경 3부작 ( 국경을 넘어 1994, 평원의 도시들 1998) 중 하나이다. 이 작품으로 전미 도서상과 전미 비평가 협회상을 수상했다.


미국 텍사스 출신의 16세 카우보이 존 그래디 콜의 멕시코 모험기로 카우보이의 세계를 구경할 수 있다. 말과 말을 주고받는 주인공 소년을 중심으로 말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이채로운 삶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소설의 제목에서조차 말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말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와 똑같았다.
그들에게는 피가 있고 피에는 열기가 있다.
그의 모든 존경과 모든 사랑과 모든 취향은 뜨거운 심장을 향한 것이었고,
그것은 영원히 변함없을 것이었다.(13p)


처음 만나는 코맥 매카시 소설에서 우선 건조한 대화체가 눈에 띄었다. 대화 부분에 따옴표가 없어 처음엔 다소 헷갈리기도 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매카시의 대화에 적응되었다. 짧은 단문으로도 아름다운 문장이 가능케 한 작가였다. 대자연을 묘사한 대목에서는 결코 닿을 수 없을 듯한 미지의 대지와 하늘이 눈앞에 펼쳐지고, 말들의 발굽 소리와 눈빛이 그려질 정도였다.

고지대 목초지에 이르러 말을 보통 걸음으로 늦추자
검은 어둠에서 튀어나온 별들이 그들 주위로 떼를 지었다.
종이 있을 턱이 없는 텅 빈 어둠 속에서 종이 울리다 그쳤다.
한 줄기 빛도 없이 어둠 속에 홀로 놓인 지구의 둥근 단 위로 말을 몰던
그들은 대지가 들어 올려 준 덕분에 별 아래에서가 아니라
별 사이를 헤치며 신중하면서도 유쾌하게 앞으로 나아갔다.(48p)


바로 전에 읽은 필립 로스의 작품과 비교를 하자면

필립 로스가 샌님 스타일로 미국 사회라는 과녁의 정중앙을 뚫었다면, 코맥 매카시는 반항아 스타일로 인생이라는 과녁을 겨누는 격이었다.

필립 로스가 현미경으로 미국 사회와 인간의 심리를 들여다보았다면, 코맥 매카시는 망원경으로 인간의 삶 전체를 내다보는 느낌이었다.


코맥 매카시는 이 작품을 통해, 선과 악에 대한 시선과 불운과 고통을 마주하는 태도에 대해 말해준다. 또한 멕시코 역사를 언급하면서 지금의 모든 세계는 희생을 바탕으로 이룬 피의 역사임을 상기시킨다.


줄거리


주인공 존 그래디 콜은 16세이다. 목장주인 외할아버지에 의해 카우보이로 키워졌지만, 외할아버지의 죽음과 부모의 이혼으로 목장이 팔리게 되자 친구 롤린스와 함께 멕시코로 떠난다. 길에서 만난 악동 블레빈스와 동행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멕시코 목장에 도착하게 된다. 말을 다루는 솜씨를 인정받아 목장에서 일하게 되고, 목장주의 딸 알레한드라와 사랑에 빠진다. 그 후 말 도둑으로 몰리게 되면서 목숨까지 위태로워진다.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해 위험한 모험을 감행하고, 모든 역경과 시련을 헤치고 마침내 고향에 돌아오는 여정을 그린다. 그러나 그의 모험은 끝나지 않은 채 소설은 끝난다.


감상


고정관념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발 딛고 사는 세상의 잣대로 소설을 읽다 보니 주인공 존 그래디가 16살이라는 사실이 자주 걸림돌이 되었다. 처음에는 존 그래디의 성숙함과 책임감, 행동력에 놀라 소설이라 그렇겠지? 만들어 낸 인물이라 그렇지? 어떻게 고작 10대 소년이 이럴 수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상상할 수 없는 세상과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이와 환경, 배경에 대한 고정관념을 벗어 버렸을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이 열렸다.


미국 서부 텍사스는 지금까지도 유명한 카우보이의 도시이고, 특히 주인공의 고향 샌안토니오는 1949년부터 시작된 로데오 축제로 유명한 도시였다. 말과 목장과 카우보이들의 고장에서 나고 자란 주인공은 연필보다는 재갈을 먼저 쥐었을 것이고, 자전거보다는 말안장에 올라타는 것이 일상이었을 것이다.


주인공은 우정, 사랑, 말에 대한 애정과 책임, 신념, 용기, 투지, 선함, 자유, 열정을 모두 갖추었는데 이는 대자연 속에서 말과 함께 자라면서 얻게 된 선물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다른 생명과 삶의 여정을 함께 한다는 것은 사람 이상의 애정과 관심과 책임, 그리고 헌신이 절대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는 각자의 삶의 터전에서 삶과 생활의 지혜를 익히고 그 앞에 주어진 삶을 걸어갈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모습이 앞서거나 뒤처지는 것이 아니며, 좋고 나쁘다가 있을 수 없는 삶, 생존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여정은 결코 친절하지도 그렇다고 다정하지도 않다.

삶의 골목 곳곳에 도사리다가 느닷없이 터지는 지뢰처럼, 삶의 여정은 불운과 고통과도 동행해야 한다.

불운을 견뎌 낸 이들은 특출해지는 법이니 불운을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이자 힘으로 여겨야지
불운 때문에 움츠러들었다가는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쓰라림 속에 묻혀 버리게 되므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구해야 하는 모험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했어(342p)


주인공이 말 도둑으로 몰려 멕시코 교도소에 수감되면서 겪은 일은 모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살벌한 생존을 건 혈투였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고 맞서는 모습,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앞에서 두려움 없이 다가서는 모습, 그리고 끝내 떠나보내는 모습 속에서 응원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영화 < All the pretty horses > 는 2000년 개봉작으로 맷 데이먼과 페렐로페 크루즈가 주연을 맡았다.

소설 속 낯선 장면들이 영상으로 펼쳐져 작품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난 영화가 두 편이 있었다.

1992년 개봉한 [ 파 앤드 어웨이 ] 아일랜드 소작농 아들과 지주의 딸의 아메리카 진출기로,

자유와 땅을 찾아 미국으로 탈출한 두 남녀의 혹독한 이야기 속에 삶의 가치와 사랑을 찾아볼 수 있었다.


미국 오클라호마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야생마를 타고 거침없이 질주하는 톰 크루즈의 모습과 소설 속 존 그래디 콜과 닮아 보였다.

       

위 두 작품이 대자연 위에 펼쳐진 로드 무비였다면 [ 첨밀밀 ]은 도시판 로드 무비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중국 본토에서 홍콩으로, 홍콩에서 다시 뉴욕으로 꿈을 찾아 도시를 찾아 헤매는 젊은 남녀의 마냥 달콤하지 않은 그러나 빛나는 시절,

얼룩진 상처뿐이라 해도 꿈꿀 수 있고, 꿈을 향해 몸부림치는 두 청춘의 모습 속에 또한 존 그래디 콜이 겹쳐 보였다.


내 인생 첫 여행은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 때 강원도 영월 집에서 경북 풍기에 있는 외갓집 방문이었다.

2살 터울의 남동생을 데리고 외갓집 주소가 적힌 쪽지를 들고 길을 떠났다.

강원도와 경북을 잇는 완행버스에 비교적 일찍 자리를 잡고 앉았지만, 장에 오가는 할머니들이 물밀듯이 올라타면서 순식간에 숨 쉴 틈조차 없이 버스가 가득 찼다. 덩치 작은 초등생이 앉은 자리를 그냥 둘 리가 만무한 할머니들이 옆자리에 끼여 타시고, 잔뜩 쟁여놓은 짐 보따리에 치여 흔들리는 완행버스 차창에 머리를 연신 박아도 혼자 나선 여행이 너무나 설레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차편으로는 중간에 갈아타야 해서 내린 곳은 경북 춘양이었다. 춘양 터미널에서 내려 영주행 표를 사고 표지판을 따라 버스를 타고, 영주에서 다시 풍기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는 제법 긴 여정이었다. 버스를 잘못 탈까 봐 어찌나 긴장했는지 지금도 터미널에 갈 때면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어린 내가 보이기도 한다.


이윽고, 도착한 외갓집은 텅 빈 채 송아지 한 마리만 지키고 있었다.

동네 할머니들과 외할아버지가 몰려오시더니 외할머니는 막내 이모의 산바라지 하러 서울에 올라가셨다는 소식을 전해주셨다.

이 일을 어째야 좋을지 몰라하던 동네 할머니들과 달리 나는 무슨 마음인지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읍내 우체국에 나가 시외전화로 엄마에게 전화해서 상황을 말했더니

"바로 올래?" 하셨다.

"아니, 여기까지 온 게 아까워서 바로 못 가고 며칠 있을래!" 했다.


그날부터 일주일 동안 나와 동생은 허클베리 핀처럼 온 동네를 탐험하며 다녔다. 외갓집 동네에는 특히 예스러운 건축물들이 많았다. 특히 외갓집 앞에 난 좁은 물길을 따라 올라가면 너른 계곡이 있었는데, 그 계곡 건너편에는 큰 절처럼 생긴 건물들이 여러 채 있었는데 이상하게 스님은 없었다. 소나무가 울창한 길이 있었고, 키 큰 돌을 세워 놓았는가 하면, 징검다리를 건너면 정자도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바로 소수서원이었다. 소수서원과 죽계계곡, 그리고 순흥 향교가 첫 여행의 주 탐험지이자 놀이터였다. 여행에서 찾은 첫 보물이었다.


또한 동네 할머니들은 순번을 정해 마치 친손주들처럼 끼니를 챙겨주시고, 간식을 넣어 주시는 보드라운 환대를 통해 사람에게서 보석을 찾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낯선 시골마을에서 일주일을 보낸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 여행 이후 나는 예전과 다름없는 일상을 보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훌쩍 커져 있었다.


유년 시절의 모험과 여행, 경험이 삶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할 수 있다. 비록 환상, 환희, 기쁨, 행복만이 가득하지는 않지만 실패와 아픔과 고통과 불운에서도 배우는 것이 오히려 많으므로.

멈추기보다는 나아가기를,

포기하기보다는 도전하기를,

그래서 그런 삶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게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난 요즘도, 가끔 그때의 시간과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거쳐간 동네 중 '춘양'이라는 말은 봄볕처럼 따뜻하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문득

봄볕을 기다릴 수는 있어도

오는 겨울을 막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책리뷰> 휴먼 스테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