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11월 즈음이 되면 전 단위 학생회 동시선거가 진행된다. 학과-단과대-총학생회로 이어지는 단위 선거를 한꺼번에 진행하다 보니, 선거운동본부가 입후보해 선거만 성사되었다면 학교는 선거철 분위기가 물씬 난다. 후보자들은 강방(강의실 방문)과 유세, 선전전을 벌이고 이를 감독하는 선거관리위원들의 활동으로 학교는 그야말로 선거운동판이 된다.
쌓아 올린 감투 개수가 차고 넘치는 나는 자연히 선거와 관련한 감투도 많았다. 1학년 때는 과학생회 선본 운동원이었고, 2학년 때는 단과대 회장 후보였다. 3학년 때는 단과대 선거관리위원장이자 중앙선거관리위원, 4학년 때는 총학생회 선본 간부, 5학년 때 과 선거 선본을 도왔고 6학년 학기 초 보궐선거 때 단과대 선관위 집행위원장... 이쯤 되니 학번이 좀 차자 복잡한 선거 규정을 눈 감고도 줄줄 외게 되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3학년 때 처음으로 선관위원장 직을 맡았을 때의 이야기이다. 실력이 없으면 불안하기 마련. 아무것도 없던 내가 선관위원장으로 선거를 준비하게 되자, 불안함과 초조함은 이상한 형태로 드러나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향응'사건이었다. 내가 향응을 받거나, 향응을 접대한 건 아니다. 그저 말 한마디가 부른 사단이었다.
선거철이 되면 학생회 집행위원 대부분을 사퇴시킨다. 누군가가 후보자로 출마 결의를 하면, 그 후보자와 한 팀으로 선본을 꾸리기 위해 현직에서 사퇴하는 것이다. 그렇게 선본의 운동원으로 내년 활동을 준비한다. 선본 활동을 한다는 것은 자연히 이듬해에도 함께 학생회 하자는 제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배들, 특히 후보자나 선본장은 후배들과 약속을 잡고 '선본원 결의'를 할 수 있도록 제안하느라 바쁘다.
그 해에도 그랬다. 내 대표자 시절 단과대 집행위원을 함께 맡았던 후배 둘이 대표자 결의를 했다. 이어서 함께 뛰던 집행부들이 줄줄이 사퇴하고 선본원으로 결의했다. 일단 선거 운동기간이 시작되면 이때부터 서로의 행동은 조심스러워진다. 마주치면 상호 존칭으로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불필요한 접촉은 삼간다. 그건 단선(단독 입후보 선본에 대한 찬반 선거)이든, 경선이든 마찬가지였다. 1년 학생회로 지지고 볶던 사이니 당연히 친밀한 관계이지만 선거의 공정성을 위한 차원이다. 학우들의 보는 눈은 많고, 아주 기본적인 원칙조차 지켜지지 않는 대중 기구는 학우 대중의 외면을 산다. 그렇게 배운 우리는 그걸 실천하기 위해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이런 학생회(대중 기구) 운영의 관점이 서지 않은 후배들은 그저 선배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며 배워가는 것이긴 했다. 모든 게 처음인 후배들을 붙잡고 대중 기구가 어쩌고저쩌고 하며 떠들다가는 아마 아무도 학생회를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같이 하면서 그렇게 어깨너머로 배우는 것이다. 문제는 같이 하던 친구들의 관점과 원칙이 아직 명확하지 않은 데도, 나 잘난 맛에 내 원칙밖에 모르던 당시의 나였다.
선거 감독 업무를 보던 어느 날, 공식적인 사유로 선본방(선거본부가 입후보하면 사무실을 하나 만들어 내어 준다.)에 업무 차 들렀을 때다. 선본원들끼리 저녁을 학교 앞 중국집에서 시켜 먹은 모양이었다. 웃으며 (존댓말로) 인사를 하고, 간단히 업무를 마치려고 했는데 이제 막 2학년이 되는 새내기 후배가 말을 건넸다.
"선배님, 이거 좀 드실래요?"
"아닙니다. 제가 그걸 먹으면 향응이 될 수 있어서요~."
지금 나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고 실소가 나온다. 굳이 그런 표현과 말을 했어야만 했을까. (향응이라는 표현이 우리 단과대 선거 시행세칙에 있어서 내 머리에 꽂힌 탓도 있었을 테다.) 후배는 당황한 듯했다. 이후로는 선본원 친구들이 아예 나를 피해 다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것도 '그래 선거기간이니 당연히 그럴 수 있지.'라며 오히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실제로 다 아는 사람이었던 총학생회 선본은 좀 더 엄격하게 중앙선관위원이던 날 대했으니까. 근데 그런 게 아니었다.
이듬해 당선된 그 선본 학생회에서 집행위원장을 맡아야 했던 나는 선거를 마치고 당황했다. 친구들은 나에게 화가 단단히 나 있었다. 우리는 친하고 가까이 지냈는데, 어떻게 그렇게 차갑게 돌변할 수 있었냐는 것. 차라리 한 총학 선본 정도에서 그렇게 했으면 대부분 선배급이었을 테니 별 문제가 안 됐을 수도 있다. 근데 여긴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되려 난 아이들의 분개를 이해하지 못해 억울해했다. 당시 내 운동 선배였던 그 선본장 누나는 씩씩거리며 억울해하는 날 '사람 만들기 위해' 아마 진땀을 뺐을 것이다. 말이야 내 말이 다 옳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게 문제의 본질이 아니었으니 더 문제였을 것이다. 그때 내 운동에는'원칙만 있고 사람이 없어서' 이런 유사한 실수를 정말 많이 저질렀다. (그렇다고 대단한 원칙을 다 알고, 원칙을 늘 잘 지키는 것도 아니었을 테지만.) 후에 한참을 선배들한테 설득당하고 나서야 아이들에게 사과를 하고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나는 결과적으로 학생운동을 그만두게 되었고, 인생의 커리어로만 보면 대학시절을 '낭비'하게 된 것처럼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때때로 나는 내가 20대를 운동권으로 살았던 게 내 삶에 보탬이 되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하긴 한다. 그건 바로 이런 지점 때문이다. 물론 아마 지금도 여전하겠지만, 공감능력을 상실하고 원칙밖에 모르는 그때의 내가 좀 변했다는 것. 이제 최소한의 공감능력과 사람 대하는 법은 안다. 부딪히고 깨지고 욕먹어가며, '사회생활' 할 수 있는 감각은 좀 얻었다. 만약 운동의 경력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보다도 더 엉망이었을 거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운동을 '대중운동'이라고 정의 내렸고, 그게 운동의 노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회 같은 대중 기구를 통해 많은 이들과 함께 우리의 고민을 나누려고 했다. 그러려면 자기가 속한 공간에서 대중들에게 사랑받아야 했기에, 나는 운동을 하며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법"을 학습했다. 지금 생각하면 여러 모순과 한계가 있었지만, 최소한 그건 분명 내게 도움과 보탬이 되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사람의 일이라는 게 참 알 수 없는 것이다. 우습게도 그 이듬해 선거에서는 이 비슷한 맥락의 문제 때문에 낙선을 했다. 내리 5년을 집권하던 우리였지만, 그해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낙선을 했다. 난 그 해 총학생회 선본 선거운동원 대장이었다. 함께 입후보한 총여학생회 선본이 반여성주의 여론에 공격받으며 총학생회 선본까지 함께 낙선을 했다. 험난했던 선거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때 나온 비판 여론 중 하나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총학생회)나 총학 선본이나, 총여 선본이나 인적 구성이 '그 나물에 그 밥'이지 않냐. 그러니 당연히 선거가 편파적인 것 아니냐 하는 주장이었다. 그걸 해명한다고 당시 중선관위는 장장 6장짜리 대자보를 붙여가며 대응했지만, 여론은 쉽게 돌아서지 않았다.
당시에는 억울했지만 시간이 좀 지나고 스스로 평가해보니, 그때의 낙선은 당시 우리 학교 운동권들의 무능과 패착 때문이었음이 명백한 것이긴 했다. 하지만 선관위와 선본 간 유착에 대한 비판은 좀 억울했다. 나는 그 해 우리 학교 운동권 중 유일하게 내 동기였던 부총학생회장을 포함해, 모든 선관위원들에게 존댓말을 썼고 절대 '향응'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