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우 Dec 10. 2022

20대의 성평등 문제에 대한 단상

설명하려 하지도, 들으려 하지도 않는 사회가 문제다.

* 이번 학기 수업의 토론과제를 작성하며 담았던 내용. 글을 쓰며 생각이 많아져서, 그 기록을 남겨두려고 브런치로 옮긴다.


  나는 오랜 시간 학과와 단과대 학생회에서 간부로 일했고, 2018년부터는 학과 학생회에 성평등위원회와 반성폭력 학생회칙을 제정하는 활동에 역할을 했다. 그러면서 그 해부터 나는 (법정 개명을 하지 않았지만) 학내에서 활동하면서 양성쓰기를 시작하였고, 실제로 당시에 나를 알던 많은 후배들은 아직도 나를 ‘김**’이 아닌 ‘김성**’으로 기억하고, 또 부르고 있다. 하지만 한 켠에서는 냉소와 조롱에 시달려야 했고, 그러면서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물어오는 이는 없었다. 혹자는 내게 “그렇다면 또 다른 양성쓰기를 하는, 이를테면 ‘이박’이라는 성을 쓰는 사람을 배우자로 만나 자녀를 출산하면 그 자녀의 성이 ‘김성이박’ 혹은 ‘이박김성’이 되는 것이냐”라고 조롱조로 묻기도 했다. 사실 이것은 본질이 아니다. 내 성이 한 글자냐 두 글자냐 그것이 가지는 의미보다, 당연하게 남성의 성을 물려받는 사회 관행을 깨 보는 시도를 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당시 나는 단과대나 학과 학생사회에서, 어쨌든 나름의 입지와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내가 학우들 앞에 서서 나를 소개할 때 나름대로 새로운 시각과 고민을 학우들에게 던지기 위해 한 시도였다. 여기에 ‘김성이박’을 묻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최선을 다해 나의 의도를 설명했지만, 사람들은 본질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처럼 많은 이들은 우리 사회 성별 갈등이나, 성평등 문제의 본질에는 관심이 없다. 그리고 조심스럽지만 지난날 한국의 여성운동 진영이 이런 ‘본질’을 설명하기 위한 노력에 과연 충실했는가에 대하여도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군대 문제가 그렇다. 한국사회에서 군필자에 대한 보상이나 사회적 처우가 실제로 부족하고, 특히나 좁디좁은 취업시장에서 경쟁해야 하는 20대 남성들에게 이것은 생존의 문제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은 긴 시간 군사독재를 경험했으며, 이것이 징병제와 함께 한국사회 전반을 수직적이고, 군사적인 문화에 익숙해지게 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20대가 공유하는 커뮤니티와 공동체에서는 그런 문제가 덜할 수 있지만, 한국사회가 현상적으로 그렇다는 것은 결코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 문제를 논하며 이것이 마치 성별 간 제로섬 게임인 것처럼 다툰다. 본질은 분단이라는 특수상황과 징병제라는 제도가 낳은 여러 부작용이지만 누가 더 보상받아야 하는지, 왜 내게 적절한 대우를 제공하지 않는지만 두고 다툰다. 왜 군필자에 대한 처우 문제를 논의하는 데 반대급부로 여성의 문제가 들이밀어져야 하는가? 군 문제 자체를 해결하려는 논의는 어디로 갔는가? 사회적 대안을 고민하는 시각은 실종되고, 개인의 이해관계를 두고 다투는 것에 자꾸만 ‘공정’ 따위의 프레임을 붙인다. 동의하기 어렵다. 더 좋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본질에 관한 논의는 실종되었고, 때아닌 여성가족부 폐지 따위의 공약이 대선전략으로 동원된다.


  성평등 문제의 층위는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한가. 어떤 이들은 비례대표 정당 명부의 여성할당제를 여성의 집단이기주의로 치부하지만, 그나마 할당제를 동원하고 나서야 한국의 여성 국회의원 수는 300명 중 50명 수준에 그친다. 성평등이 실현된 사회라면야 당연히 할당제를 폐지하는 게 옳으니, 여성할당제는 그 자체로 스스로를 폐지하는 데 목적이 있는 제도라 할 법한데 그 끝은 묘연하기만 하다. 그러나 아무도 이런 본질은 토론하지 않는다. 직장 내 여성의 지위는 어떠한가. 무고 피해 사례를 들어 성폭력에 대한 형사 절차를 비난하며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보는 사회를 지적한다. 그 누구도 남성이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 적이 없다. 성급한 일반화와 일반성의 인식은 구분되어야 한다. 남성 가해자 수가 압도적이며, 실제 무고 사례 비율은 극히 미미한 현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토록이나 다양한 층위와 측면의 본질이 토론되어야 하지만 설명의 노력도, 경청의 노력도 너무나 부족하기만 하다. 


  게다가, 특히 소위 20대 여론이라고 하는 것이 수도권 20대 대학생의 여론 중심으로 다뤄지는 측면도 있다. 자신의 삶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문제를 사회적 차원의 문제로 다루고 토론한다면, 그 너머 본질을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비교적 형식적 성평등에 익숙한 우리 세대, 주어진 파이 자체가 작은 우리 세대에게는 성평등 문제가, 마치 허구적 망상에 기반한 여성들의 집단 이기주의 정도로 인식될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우리가 사는 사회는 불평등하다. 직장 생활을 하는 우리 선배, 부모세대의 삶에서는 더욱 그렇다. 모든 면에서 그렇지 않지만, 어떤 면에서 분명 그렇다. 이런 상황적 인식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내는 데에서 출발해야 하며, 그 시작은 설명하는 것이고 또 듣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여성의 권리를 신장해 성 평등을 이룩한 사회가 결코 남성에게 불리한 사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한 개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소수자성과 다수자성을 경험한다. 지방과 수도권, 나이의 많고 적음, 장애의 유무, 성적 다수자인가 소수자인가, 외모, 경제력, 직업, 학력 등 다양한 차원에서 소수자성과 다수자성은 개인을 교차하고 있다. 성차별이 존재하는 사회는 어떤 남성에게 불이익일 수 있고, 또 어떤 여성은 어느 순간 반사이익을 누리는 사회일 수도 있다. 구조적 차별이란 그렇게나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나는 이런 측면에 대한 강조로, 성평등을 위해 함께 노력할 남성을 얻는 설득의 과정이라는 인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여성주의가 싸워야 할 적은 개별 남성이 아니라, 남성이 전유하는 권력, 그것을 만드는 구조, 사회 깊숙이 뿌리내린 가부장제와 같은 것들이다. 양 측에 모두 비판받을 수 있는 주장이지만 기꺼이 그렇다고 주장하고 싶다.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길, 그야말로 지난한 일이지만 “왜 불평등한 사회인지” 차근차근 설명할 수 있는 사회여야 하고, 또 기꺼이 마음 내어 들어봐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익명 커뮤니티에서 온갖 날을 세우며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는 이들에게 그렇게 읍소하고 싶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한국의 성평등은 일면 진보했고, 또 일면에서는 후퇴하였다. 왜 그렇게나 여성주의가 주목받는 가운데, 역으로 여성 권리에 대한 인식은 후퇴하는 기형적 상황이 벌어졌는가? 나는 그것이 어느 순간, 여성운동은 설명하기를 포기했고, 또 안티의 입장에 선 이들은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이전글 사고와 참사 사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