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국학진흥원 편-
첫날 그렇게 고생하면서 봉정사를 다녀왔지만 아직도 나에겐 두 곳의 취재 장소가 남아 있었다. 둘째 날은 한국국학진흥원으로 가는 날이다. 이날은 부서 부장님과 함께 취재를 떠났다. 아직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기에 많이 어색했다.
한국국학진흥원 역시 버스를 타고 가려면 한참이 걸린다. 게다가 이번엔 버스 자리까지 없어 서서 가야 했다. 사람이 의외로 많아 대화를 할 수도 없었던 상황이라 그저 묵묵히 있었다. 그러다 보니 창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한여름이라 푸릇푸릇한 나무와 함께 어우러진 호수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더 집중해서 관찰하니 '안동 선비 순례길'이라는 이름으로 그곳을 걸을 수 있는 길이 형성돼 있었다. 찾아보니 꽤 긴 코스이지만 한 번쯤은 그렇게 걸어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도착한 한국국학진흥원은 생각보다 더 컸다. 계단도 많고. 많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니 입구가 나왔다. 그리고 안내사의 안내를 받아 유교 책판이 있는 한국국학진흥원 유교 문화박물관 4층에서 김유경 학예사의 도움을 받았다.
먼저 준비해 온 질문을 했다. 예를 들면 '유교책판은 왜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됐나요?' '유교책판이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되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해주세요.' '현재 유교책판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나요?' 등 인터넷으로 찾아봐도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내용이었지만 한 사람과의 인터뷰를 통해 더욱 생생하고 자세하게 들을 수 있어 물어볼 수 있는 질문들은 모조리 다 했다.
김 학예사는 “목판이 탄생하기 이전 종이가 발명되면서 기록 문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며 말문을 열었다. “외국 서적이나 많은 사람이 읽고 싶어 하는 책을 필사하는 것이 전부였고 대량 생산에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목판이 제작됐다”고 말했다. 이어 목판, 즉 책판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목판의 특징은 활자와는 다르게 줄이 흐트러지지도 않고 관리만 잘하면 오랫동안 보존이 가능하다. 또한 목판은 선조의 가르침을 간직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기에 그 내용이 유언을 뜻하거나 목판이 유품, 또는 그 인물과 동일시해 제작·관리에 신경을 많이 썼다.
안동대신문 493호 6면
김 학예사는 귀찮은 기색 없이 모두 친절히 설명해줬고 인터뷰가 끝난 후 유교책판을 보기 위해 이동했다. 유교책판을 향해 또다시 계단을 올랐고 드디어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2015년 10월 9일 12번째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유교책판은 서책을 원활하게 보급하기 위해 제책 형태로 인출하도록 제작됐다. 이는 단순히 인쇄용으로 사용됐다고 할 수도 있지만, 선현이 남긴 학문의 상징으로 간주해 후대 학자들이 이를 누대에 걸쳐 보관 및 전승했다. 유교책판은 지금도 인출이 가능할 정도로 원래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유교책판은 각 지역의 지식인 집단들이 시기를 달리해 만들었다. 수록 내용은 정치·사회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고 이들은 궁극적으로 ‘도덕적 인간의 완성’을 추구하고 있다. 이는 16세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지속하면서 세계 최고 수준의 유교적 이념 국가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유교책판은 공의를 통해 이뤄진 공동체 출판의 형식을 띠고 있으며 내용으로는 집단지성의 결과물이다. 이것이 바로 유교책판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이유다.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유교책판은 따로 공간을 만들어 최적의 환경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일반인이 가까이서 보진 못한다. 그나마 창을 통해 그 수많은 자료를 확인할 수 있다. 그중 몇몇 책판은 따로 전시를 시행하고 있는데 하나하나 모두 설명을 들었다. 너무 많은 정보를 알려줘 미안할 정도였다. 지면은 정해져 있고 필요한 내용은 일부분이기에.
다른 의미로 힘겨운 취재를 끝낸 후 사무실로 돌아가려는데 버스 시간표를 보니 버스 시간이 한참 남았다. 조금 걱정됐지만 다행히 선배가 연애상담을 해달라고 해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즐겁게 신문사로 돌아와서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다음날 또 취재 갈 생각을 하니 눈 앞이 아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