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하고 뭐하세요
무용한 걸 좋아하지 않는다. 무용한 사람이 되는 것도 싫었다. 완벽주의자처럼 보이는 것도, 맹목적으로 열심히 하는 습관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그래야 안심되었기 때문이었다.
다니던 직장에서는 이삼년에 한 번씩 전보발령이 있었다. 부서를 옮기고 새 업무를 담당하게 되면 모든 것이 제로에서 시작된다. 관련 법률도, 관련 단체도, 관련 부서도 달라진다. 또다시 신규 직원이 된 기분으로 몇 개월을 보내야한다. 연락처도 묻고 법 적용 해석도 묻고 상급 부서 담당자와도 인사를 터야했다. 업무 뿐 아니라 발령 받은 부서의 분위기에도 적응해야한다. 문구류를 보관하는 사물함 위치에서부터 단골 밥집 연락처까지 사소한 부분조차 새롭게 세팅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생긴 말이 ‘전입 고참’이었다. 그 부서에 얼마나 오래 있었느냐가 중요했다. 묻지 않아도 되니까.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는 것이 힘이 되니까. 그렇게 일 년이 지나면 익숙해지고 이년이 지나면 지겨워진다. 그래서 전보발령 시기는 지겨움을 탈출하는 희망이 되기도 하고 무용함을 견디는 괴로움의 시간이 되기도 했다. 신규 임용을 받으며 시작한 등초본 발급에서부터 음식물쓰레기, 광고물 조사 같은 생활 밀착형 업무도 경험했고, 공사와 물품 계약을 하면서 재무 회계 처리도 해보고, 선거 업무도 맡아 보고, 단체와 행사 지원을 하기도 했다. 이십년간 부지런히 포지션이 바뀌었는데, 무용함과 적응의 시간을 오가는 동안 전문가 수준은 아니지만 일반 행정을 다루는 직업인으로 나름 열심히 변모해온 셈이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유용하고 쓸모 있게 사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란 사실을. 자신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기만 해서는 나를 떠받치고 있는 또 하나의 기둥이 힘을 잃는다는 사실을. 어쩌면 깊은 방에 살고 있는 진짜 나는 텅 빈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더 쓸모에만 매달렸는지도 모르겠다.
퇴직 즈음에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에너지가 몸에 들어왔다. 한 단어 한 문장 이어나가는 동안 바깥으로 흘러나가던 힘이 내 안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내가 고른 단어에 내 모습이 비춰졌다. 글 하나가 완성되면 책성 서랍 하나 정리한 기분이었다. 나 자신과 정성껏 대화하고 나면 뒤죽박죽이던 생각에 질서가 생겼고 복잡했던 마음도 덩달아 차분해졌다. 그런 과정이 좋아서 또 쓰고 싶어졌다. 물론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학원에서 이것저것 배우던 시절이 있었는데 방송 댄스도 그 중 하나였다. 댄스 가수처럼 유연한 몸놀림은 아니어도 내 몸에 붙은 팔다리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았는데 완전히 착각이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뇌의 명령을 벗어난 허우적거림 그 자체였으니까. 글쓰기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 마음도 아니고 내 마음을 적어보겠다는데 아는 단어를 총 동원해도 문장 하나 끝맺기가 힘들었다. 뜻이 통하게 썼다 해도 감정만 격하고 의미는 모호하거나 너무나 상투적이어서 내가 먼저 지겨워진 경우가 많았다. 힘든 거구나. 시간 순서로 지나가버린 일들을 다시 되돌려 보는 것은. 거기에 담긴 내 감정을 살피고 의미를 알아보는 것은. 연습이 더 필요하다. 연습만으로 해결 될 일은 아니겠지만 아직도 어딘가 들뜨고 야무지지 않은 내 글에 계속 매달려봐야지. 아, 글을 쓰면서 여유가 조금 생겼나보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기다리는 여유. 지금 당장의 수준에 조급해하지 않고 스스로 기회를 주는 여유. 그러고 보니 지극히 무용한 일이 지금의 나를 살게 한다.
아침 산책길에 핀 장미가 흐드러지기 시작했다. 연두 빛이던 가로수 잎도 어둡게 짙어졌다. 어제 같은 오늘이지만 자연은 제 속도대로 변하고 있다. 제자리 박기 같은 하루하루 속에도 사라진 것들, 사라질 것들, 다가오는 것들이 교차된다. 이제 무용함의 선물을 손에 꼭 쥐고 천천히 걸어가야지. 산책이 끝나면 시원하게 샤워도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