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페넬로페 Jul 27. 2023

산책

너희와 함께 걷는 길

플로라는 어제 저녁부터 입천장에 조금씩 물을 묻혀주면 삼키기를 시작했어요. 입을 닫아버린지 일주일 만에 물 한 방울 먹어주는 게 왜 이렇게 감사한지요.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집 앞을 오분정도 걷기도 했답니다. 플로라와 얼마나 함께 걷고 싶었던지... 지난 일주일이 지옥 같았어요.


플로라는 아직도 암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래도 에디슨병일 가능성이 높은 상황으로 진단을 받았답니다. 플로라가 사라져 버릴까 봐 매일을 울며 보내던 시간이 흐르고, 그래도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이제 우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서 다행입니다. 이제 곧 제가 잘만 보살핀다면 맘껏 뛸 수도 있고, 맛있는 것들을 먹을 수도 있겠죠?


수에르와 플로라가 우리 가족이 된 순간부터 산책은 우리 가족의 일상이 되었어요. 새벽에 일어나 산책을 하고 저녁에 퇴근을 하면 또 산책을 하는 일상이 시작된 거죠. 물론 피곤한 날에는 온갖 핑계를 대면서 시간을 늦추기도 했었지만, 온종일 산책만 기다렸을 이 녀석들을 생각하면 이 중요한 행사를 거르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어요. 물론 지금도 그렇고요. 하지만 우리에게 사람 아들, 솔이가 찾아온 후로는 우리의 산책도 조금씩 변해 갔답니다.


산책은 생각보다 벅찬 일정이었어요. 수에르와 플로라가 둘 다 대형견이다 보니 수에르 한 시간 플로라 한 시간의 산책은 필수였고 퇴근 후에도 각각 한 시간씩 산책을 하고 나면 어느덧 밤이 되어 지쳐 잠드는 게 제 일상이었으니까요. 시간만 계산하자면 하루에 4시간 산책이라니 정말 대단하죠.



그래도 이 녀석들과 함께하기로 한 이상 산책의 약속을 지키는 건 너무나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근데 한 살도 안된 아이를 보살피는 현실에서는 하루에 한 시간도 내기란 쉽지 않은 거예요. 아침엔 솔이를 씻기고 밥 먹이는데 시간을 사용해야 했고 밤엔 이교대로 일하는 남편이 없는 날도 많았기 때문에 강아지만 데리고 밖으로 나갈 수 없었죠. 그래서 우리의 산책은 정해진 시간인 오전 오후 1시간씩이 아니라 시간이 생갈 때마다 짧게 진행하는 불규칙한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어요.


그래도 이 녀석들이 대소변을 잘 참아주고 밖에 나갈 때마다 대소변을 처리해 주니 실내에서도 별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솔이가 조금 더 자라고 제가 하는 일들도 많아지면서 제겐 산책 시간을 더 단축시킬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선택했던 방법이란 게 두 녀석을 한꺼번에 데리고 하는 산책이었는데요. 사실 제 느낌으론 두 녀석 모두 혼자 집에 남겨진 것보다 함께 걷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죠. 하지만 강아지 전문가들은 한 마리씩 산책하는 걸 추천하고 있답니다.


그렇게 시작된 두 녀석 동시 산책!

그리고 그때부터 최근 일주일 전 플로라가 사경을 헤매기 전까지 우린 동시 산책을 해왔답니다.


하지만 두 녀석의 산책 스타일이 너무 다르다 보니 한 마리는 양보를 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되었죠. 물론 양보란 게 양보의 아이콘인 플로라가 하면 그만인 것이기도 했어요. 이곳저곳 오줌 싸기를 좋아하는 수에르가 몇 발자국 가기 전부터 오줌을 싸기 시작하면 기다려주는 건 당연한 것이었고, 수에르가 응가를 할 때도 다른 풀의 냄새를 맡을 때도 플로라는 기다렸어요. 사실 플로라는 실외배변을 하긴 하지만 사람들이 보는 장소에서는 절대 대소변을 보지 않거든요. 장소를 찾고 찾아서 어둡고 침침한 어느 골목 어귀, 건물 뒤 등을 발견하면 그때서야 겨우 소변을 보고 대변은 저희 집 뒤뜰에서 눈치를 100번은 보다가 보는 스타일이었죠.


플로라가 아프고 나니 이 모든 게 왜 이렇게 미안하기만 한 걸까요. 한 시간만 덜 자면 플로라와 수에르를 따로 산책시킬 수 있는 건데... 제가 피곤하다는 이유로 제가 책임져야 했던 것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쩌면 제가 이 녀석들을 산책시키는 게 아니라 이 녀석들이 저를 걷게 만들어준 것일지도 모르는데, 이래저래 피할 방법만 생각해 온 것도 같고요.


최근 일주일간은 플로라가 병원에 입원해 있다 보니 수에르 혼자 산책을 했는데요. 플로라가 없는 걸 슬퍼하는 기색이 없는 수에르가 한편으론 얄밉기도 했지만, 산책을 여유롭게 즐기고 공놀이도 즐겁게 하는 걸 보니 그동안 혼자서 데리고 나가지 못했던 게 너무 미안해지기도 하더라고요.


강아지와 함께하면서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들을 내 기준에 맞춰 바꿔버리고 또 그 바뀐 기준에 의해 적응해 가는 아이들... 생각해 보면 제 행동이 너무 무책임했고 미안해지는 것 같아요. 플로라가 생사를 오가는 시기를 보내면서 우린 우리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지켜야 했던 것들을 다시 찾아내서 이 녀석들을 위해 지키며 살아가고 싶어요.


오늘부터 시작이다. 개별 산책!

작가의 이전글 플로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