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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중정원 Sep 24. 2022

지나가 버린 베이지색 바지.

“이것도 아냐.”


택배상자를 열자마자 나온 것은 또 한 번 내 맥을 탁 끊어놓았다. 부푼 기대를 안고 열어본 것은 바지가 들어있는 상자.


“아니, 그렇게 똑같은 게 어디 있겠냐고?”


옆에서 택배상자에 다시 산 물건을 집어넣으며 반품 준비를 하는 나를 보고 엄마가 핀잔을 주었다. 벌써 이번에 5번째 반품이었다.


“반품비만 바지 값만큼 나오겠다. 으이구… 쯧쯧.”


 혀를 차며 엄마는 내가 뜯자마자 다시 포장해 놓은 택배상자를 받아들고 집 문 앞에 내놓으러 갔다. 뭔가 대단한 걸 찾는 건 아니었다. 그냥 누구나 집에 한 벌쯤은 있는 베이지 색의 바지였다. 이토록 찾아 헤매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것도 아무렇게나, 아무 옷에나 매치해 입는 베이지 색의 바지가 될 줄이야.


 발단은 5년 전 구매했던 그것으로부터였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청산하고 내려올 무렵, 정리를 할 에너지도 없었던 나는 큰 상자를 구해 대충 옷이고 살림살이고 하나로 집어넣은 채 낙향(落鄕)했다. 꾸려놓은 짐 꾸러미는 고향에 내려와서 계절이 바뀌도록 풀어보지 않았고, 상자의 부피를 버티다 못한 부모님은 나 몰래 내 짐을 정리해 집안 곳곳에 물건들을 흩뜨려 놓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갖고 있던 모든 것들은 곧 집안 곳곳에 켜켜이 쌓여가며 원래 그 곳에 있던 것처럼 자리를 잡았고, 나도 이내 내가 가졌던 것들의 80%이상은 잊은 채 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적응해 나가듯, 나 역시 나의 물건들처럼 그렇게 내 고향에서의 삶에 어울리게 되었을 무렵 여느 때처럼 옷장을 뒤적거리다 면 바지를 하나 발견했다. 


‘어, 이거…?’


 그것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실습에 필요한 복장이라는 사측의 안내에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급하게 구입한 베이지 색 바지였다. 단 ‘하루’의 실습을 위해 구매한 그 바지는 그 뒤로는 입을 일이 거의 없었다. 일할 때는 항상 정장 차림이었으며 날이 더워지며 일상 차림에서도 긴 바지를 꺼낼 일이 줄어버렸기에. 어쩌면 강제로 구매한 이력 때문에 그다지 정이 붙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랬던 그 바지를 막상 고향에 내려와 보니 새삼 이렇게 반가울 수가. 다시 보니 어떤 색과도 잘 어울리고, 가지고 있는 다른 옷들과 질감이 유사해 코디하기도 쉬웠던 그 바지는 그 뒤로 고향에서 내가 가장 즐겨 찾는 옷이 되었다.


 옷은 소모품인지라 입는 만큼 금방 해지게 되어있다. 내 바지 역시 그렇게 조금씩 닳아가고 있었고, 앉아서 근무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에 비례해 점차 무릎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유명 SPA브랜드에서 구매한 바지였기에 같은 것을 구매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언제든 새 것으로 대체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바지가 더는 못 버티겠다고 비명을 지르기 직전이 되어서야, 해당 브랜드에서 바지를 주문하게 되었다. 모니터 또는 휴대전화 액정 속의 그 컬러는 내가 현재 입는 바지와 동일해보였으나 웬걸. 택배상자를 받아보니 채도도, 명도도 약간씩은 달라져 있는 제품이 도착했다. 따져 물을 이유는 없었다. 그저 ‘그 때와는 톤이 조금 바뀌었구나.’ 하고 생각하고 마는 정도.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당장 대체할 것을 어디서든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그 바지의 대체품을 찾기 위해 몇 번이고, 몇 개의 사이트와 브랜드를 돌아가며 검색을 했다. 베이지 팬츠, 밝은 베이지 팬츠, 노란 빛이 감도는 베이지 팬츠…. 찾으면 찾을수록 내가 입는 바지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이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 유일무이한 바지인 것처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옷장에 다른 톤의 베이지 팬츠가 3개나 더 있는데도 이제 같은 것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은 나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여러 번의 택배 반품은 그러한 좌절감에 저항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나에게 최적화 되어 있는 그 바지를 더욱더 애타게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나는 과연 그 바지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했던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편하게 생각하고 막 편하게 착용했던 것은 아닌가? 


 평소 일상에서 받는 감흥은 그다지 크게 와 닿지 않는다. 언제든 반복되는 것이며 내일도, 내일 모레도 같은 감흥이 존재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무엇이든 흔해 보이는 것도 그 순간이 지나고 나서 다시는 그것을 겪지 못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소중함을 알게 되듯, 그 바지는 이제 나에겐 이미 지난 순간이고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한 부분이 되어 있었다. 만약 내가 그것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이렇게 무방비하게 흘려보내진 않았을 텐데. 지금 내 옷장 안의 면바지는 나에게 ‘지나간 순간’의 소중함을 환기해 주는 매개체가 되어버렸다. 역시 무엇이든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법이며 보인 만큼 비로소 깨닫게 되는 법이다.


 첫 직장의 입사 동기 중에는 나이가 많은 분이 있었다. 그 분은 나름대로의 직장 생활 팁이라며 나에게 ‘항상 바지를 구매할 때는 두 벌을 구매해야 한다.’고 말해주었었다. 하나만 입으면 금방 닳아서 못 입게 되니, 두 벌을 돌려 입어야 한다며. 그 분이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런 팁을 주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진 않지만 그런 팁을 듣고도 미리 대비하지 못한 내 자신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아직도 그와 같은 바지는 찾지 못했다. 오늘도 인터넷 쇼핑몰에 올라온 사진만 바라보며 ‘이 녀석은 그래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며 대체품만을 기웃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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