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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누끼 호수의 밤, 비가 내렸던

2. 불빛으로 피어난 우리의 이야기들

by 힘날세상


밤을 새워 비가 내렸다. 준비한 텐트의 완벽한 방수 기능을 자랑하던 아들은 결국 타푸를 빌려왔다. 텐트는 완벽하게 비를 막아주겠지만 비좁은 텐트 안에서 옹색한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타푸를 때리는 빗소리는 타누키 호수의 밤을 한층 곱게 단장해 주었다. 그 빗소리와 함께 작은 LED램프는 꼭 필요한 만큼만 어둠을 밀어냈다.


아들이 소고기를 구웠다. 불판 위에서 소고기가 구워지는 냄새가 한꺼번에 올라올 즈음, 동그란 나무도마 위에 구워진 고기를 나란히 올려놓았다. 요리에 능숙한 손놀림. 몇 개의 소지지도 고소하게 굽더니 계란과 햇반으로 볶음밥인지 계란밥인지 뚝딱 만들었다.


ㅡ위스키가 좋은 건, 뒤끝이 없다는 거야.

술을 못하는 나의 잔에는 상당한 분량의 우유를 채워주며 나를 쳐다본다. 모두들 위스키 따로 우유 따로 마신다고 하는데 나는 우유를 섞어서 마시는 걸 알고 있었나 보다. 알싸한 향이 혀끝을 감싸 안았다.

ㅡ위스키 독하긴해도 가볍지가 않은 것 같다. 독특함이랄까, 뭐, 개성 같은 것?

어딘지 모르게 잡아당기는 느낌, 그런 게 있었다. 우유 속에 빠진 일본 위스키 후지산로쿠Fujisanroku 富士山麓는 오랫동안 나를 붙들고 있었다. 빗소리와 함께.


아들은 혼자 살고 있다. 대학생 때부터 시작된 혼자 살이에 익숙해 있다. 천호동 오피스텔에서 몇 년을 살다가 부동산 폭탄이 터지기 직전, 수지구청 부근에 거처를 마련하였는데, 이삿짐이 한 트럭이었다. 요리를 잘해서 실어도 실어도 끊임없는 부엌살림, 책과 함께 아들은 경기도민이 되었다. 이삿짐을 다 들여놓으면서 아들에게 일종의 굴종이고 패배까지는 아니어도 다른 색을 칠해야 하는 또 하나의 삶이라고 말했다. 아들은 그렇다고 했다.


ㅡ세월이 어떻게 흐르는지 알아?

빗소리가 얹히는 잔을 들며 넌지시 입을 떼었다.

ㅡ제멋대로 흐르지 않나?

텐트에 달아 놓은 LED 불빛이 미처 밀어내지 못한 어둠이 아들의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ㅡ그렇긴 하지. 우리는 어떻게든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하려고 하고. 그래서 사는 게 어려운 거지.


경기도민으로 사는 것과, 퇴근 후까지 이어지는 문제집 집필과 학평 출제의 부담과, 틈틈이 이어가는 달리기에 대해 말했고, 코로나로 인해 가라앉은 여행에 대해 말했다. 나는 늙어가는 것에 대해 말했다. 힘이 빠지는 이상으로 자신감이 자꾸 떨어져 나가고, 젊었을 때부터 연을 맺어 온 사람들이 서나서나 멀어져 가는 일반적인 노년의 삶에 대하여, 그리고 지금 내가 건너고 있는 황혼의 강江에 대하여. 외롭지는 않아도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다는 생각이 밀려오는, 나와 아내의 빛을 잃어가는 시간들에 대하여.


ㅡ그래도 너는 네 보폭으로 걸음을 걸어라. 우리는 우리의 박자대로 호흡하며 세상을 향할 거니까. 가정을 이루어도 너희들의 방식대로 살아.

후지산 로쿠의 향을 느끼며 아들과 잔을 부딪쳤다.

ㅡ아버지, 여러 가지로 죄송해요. 아버지는 언제까지나 아버지일 줄 알았지. 어렸을 때 무엇이든 해결해 주고, 캠핑장마다 불을 밝혀주던. 자신감이 떨어진다는 말이 가슴에 아프네.

ㅡ그렇다고 해도 아버지는 아버지 방식대로 사는 거야. 퇴직하면서 내가 준비한 것은 혼자서 살아가는 마음가짐이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몸에 배어들었고. 괜찮아. 그래도 엄마와 같이 연금 나눠 쓰며 편안한 마음으로 살고 있으니까. 넉넉하지는 않아도 부족하지도 않아. 우리가 너희들에게 걸림돌은 안되어야지.

딩크족에 대해 말했고, 젊은이들이 지향하는 삶의 방향을 놓고 잔을 부딪치고 홀짝홀짝 마셨다.

ㅡ엄빠는 너의 삶에 끼어들지 않을 거야. 너의 생각으로. 너의 관점으로 살아가는 네 인생이니까. 이건 취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빗줄기는 더 굵어졌다. 옆에서 밤을 즐기고 있는 여자분들. 여고 동창쯤 될까. 그들의 이야기는 낭창낭창하게 휘어지며 섞어졌다. 살아가는 이야기. 얼핏 얼핏 들려오는 그녀들의 대화는 30대 후반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애환哀歡으로 이어졌다. 아기 엄마의 이야기와 미혼의 이야기가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삶은 계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삶아도 같은 모양인. 저들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였고, 저들 또한 우리의 이야기를 자기들의 삶에 이어보고 있을 터이다. 오늘 비 내리는 타누키 호수에서.


국립대학이었지만 입학금 한 번 내주고는 제 힘으로 학교를 다녔던 것이 마음 아프고, 혼자서 겨우 몸을 누일 수 있는 고시원에서 불평 없이 젊음을 내맡겼던 게 지금도 앙금으로 남아 있다. 내 집에서 밥 먹이고, 잠재워서 학교에 보냈더라면, 거리감은 있었을지라도 울퉁불퉁한 이야기라도 많이 나누었더라면 아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많이 가셨을 것을. 끊임없이 내리는 비는 은근하게 밀고 들어오는 추위에 패딩을 두르고 아들 앞에 앉아 있는 나를 울리고 있었다.


ㅡ라면 한 개 끓일까?

ㅡ밤에 먹는 게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분위기도 있고, 너랑 먹으면 좋긴 하겠다.


마트에서 사 온 계란과 새우를 넣고 끓인 라면은 역시 국물이 좋았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뜨거운 국물은 그대로 즐거움이었다. 밤과 함께, 아들과 함께하는 즐거움.


ㅡ그래, 연애 사업은 어떠냐?

기어이, 기어이 끄집어내고 말았다. 의식의 심층부에 깊이깊이 가라앉혀 놓았던 이야기.

ㅡ왜 안 하시나 했지.


비혼은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30대 후반의 젊은이들이 결혼을 못하는 이유를 줄줄이 내놓았다.

ㅡ사람을 만나는 게 쉽지 않아요. 30대 후반의 결혼이 그래서 쉽지 않다고 하기도 하고.

ㅡ사람을 만나는 건 언제나 어렵지. 나하고 딱 들어맞는 사람을 만나려는 생각을 버려야지. 한 발씩 물러나서 서로의 부족함을 메꿔가며 사는 게 인생의 참맛이지. 그것이 제대로된 사랑이고.

나는 낡아빠진 원론같은 말만 하고 있었다.

ㅡ알죠. 아는데...

ㅡ살다 보면 입맛까지 같아지고, 잠버릇까지 같아지는 게 부부야. 내가 바라는 건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이야. 연애와 결혼이 다른 건 결혼하면 아무리 뜨거운 연애의 감정도 무뎌진다는 거야. 무뎌지는 것 속에 모든 게 담겨 있다 너. 무뎌지지만 무뎌지지 않아야 하는 것. 무뎌져도 끝까지 움켜쥐고 있어야 하는 것. 그게 배려고 존중이지. 부부는 옷과 같은 거야. 갈아입으면 그만일 수도 있는. 그러나 새 옷이 남보기에는 좋아 보여도 늘 입던 옷이 내 몸에 더 편안한 것처럼 그런 마음을 끝까지 가지고 사는 되는 거야.

ㅡ그렇죠. 나를 모두 다 맡길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더라고. 그래도 노력은 해야죠.

ㅡ너, 중요한 게 뭔지 알아? 그런 사람이 기성품처럼 존재하고 있는 게 아냐. 그런 사람은 서로 만들어 가는 거야. 그러니까 너부터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거야. 자기를 다 맡겨도 될 사람. 내 통장을 다 맡겨도 될 사람.

ㅡ그래야죠. 사람이 중요하니까.



기분이 좋았다. 아들을 따라 후지산 아래까지 캠핑하러 오기 잘했다. 여행도 그렇지만, 아들과 소곤소곤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을 어찌 높이 사지 않겠는가. 또다시 캠핑을 나설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들과 편안한 마음으로 나지막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리저리 바라보았던 후지산이 감동적이었다고 해도, 후지산이 만들어낸 이곳저곳 관광지와 시라이토 폭포가 아름답다고 해도 이 밤, 빗소리와 더불어 아들과 보낸 시간에 어찌 비하겠는가.


타프를 두드리는 빗줄기는 굵어가고 밤은 깊어갔지만, 우리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주변의 모든 불이 꺼지고 나서도 우리의 마음에는 즐거움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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