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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의 밤은 참 아름다웠다.

부족한 선생을 환대해 준 그들이 있었기에

by 힘날세상


판교역 1번 출구 근처라고 했는데, 건물을 한 바퀴 돌고서야 찾았다. 그들이 판을 벌인 식당은 참으로 꽁꽁 숨어 있었다. 내가 그들 앞에서 많은 것들을 숨겼던 것처럼.


1992년 2월이었으니까 30년이 넘었고, 이제는 지천명에 이르러 세상을 힘 있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30년 전 그대로였다. 머리가 벗어지고, 배가 불룩 튀어나왔으며, 얼굴에 주름살이 자리 잡았을지라도 그들은 그때 그대로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을 했던 졸업생들이 해마다 불러준다. 졸업 20주년 행사를 하면서부터니까 벌써 13년째이다. 만날 때마다 유쾌한 모습이어서 좋다.


고등학교 동창이 가장 끈끈한 연으로 묶이는 것 같다. 졸업 후 진로가 제각각이어서 다양한 삶을 이어가고 있기에, 그들이 내놓는 이야기가 참으로 다양하다. 그 다양함이 힘이 되어 서로를 돕고 도움을 받는다.


고3은 물어볼 것도 없이 대학입시에 매진해야 한다. 그러나 그게 참 쉽지 않다. 놀고 싶은 게 사람의 본능이니까. 그런 까닭에 고3교실에는 늘 흔들림이 가득하다. 학생들은 그게 하나의 재미가 될 수도 있고, 교사에게는 긴장감을 가져다준다. 교사는 그 흔들림이 터지지 않도록 붙들어 매고 움켜쥔다. 그러나 꼭 교실에서는 폭발음이 들리고 만다.


그해 6월, 인접 대학의 축제에 그들은 모두 참석했다. 야간자습하라고 불을 켜둔 교실은 내팽개치고 그들은 학급 실장의 인솔하에 가수들이 판을 벌이는 무대로 나아갔다. 터진 봇물처럼. 그들은 즐거웠고 흥이 났다. 돌파구였고, 일탈이었다. 그날 늦은 밤, 파출소 두 곳을 찾아다니며 나는 각서를 쓰고 그들을 데리고 나왔다. 파출소에서 내가 한 말은 '모든 게 제가 잘못 가르친 탓'이라는 말뿐이었다. 사실 잘못 가르친 게 맞다.

'학생들은 가르친 대로는 하지 않아도 본 대로는 한다'는 말이 교사들 사이에 흘러 다닌다. 교사의 언행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 앞에서 나는 참 많은 것을 숨겨야 했다. 그러나 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고 했던가. 그것보다 더 감추지 못하는 게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학생들은 담임을 닮는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모든 게 자업자득이라고, 다 내 탓이라고 속으로 말하면서 파출소를 나왔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그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그들 탓이라고, 나는 내 탓이라고. 그러나 그들은 서로 싸우지 않았고, 남의 물건에 손대지는 않았다고. 공부에는 소홀하기도 했지만, 급우들끼리 차별은 하지 않았었다고. 늘 어깨를 감싸고 서로를 바라보며 같이 울고 웃었다고.


나는 그들 앞에서 늘 뿌듯하고. 그들 앞에서 늘 부끄럽다. 담임교사로서 부족한 점이 많았고, 그런데도 날 매년 이렇게 챙겨주기 때문이다. 부모나 선생이나 자식들이, 가르친 학생들이 나보다 열심히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볼 때 힘이 나고 행복하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을 가장 좋아하는 게 부모이고 선생이다.


그들이 졸업하고 열심히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나는 공교롭게도 또 다시 3학년 7반을 맡게 되었고, 여러 가지로 힘이 들었다. 5월 어느 날 그들과 만나 밥을 먹다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들은 치킨과 피자를 들고 자기들이 공부했던 그 교실로 후배들을 찾아왔다. 공부보다 더 중요한 건 올바른 마음이라며 한 명 한 명 등을 다독여 주었다. 자기들이 이 교실에서 그렇게 성장했다고, 그것이 발판이 되어 현재 남에게 손가락질받지 않고 살고 있다고. 후배들에게 떳떳이 충고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3학년 7반에서는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한 힘을 길러야 한다고.우리 학교는 그런 학교라고. 그날 거의 아버지 같은 선배들의 가르침은 큰 힘을 발휘했고, 그때 가르침을 받았던 후배들도 사회인이 되어 나름의 위치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선생은 참 많은 학생들을 만나고 연을 맺는다. 교실에서 차갑기도 하고. 뜨겁기도 하면서 얽히지만 훗날 그게 다 삶의 밑거름이라는 걸 알게 된다. 졸업생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선생은 배가 부르고 힘이 난다.


참 맛난 식사를 했다. 한데 어우러지고 웃음을 섞어가며 먹는 밥이라 그대로 피와 살이 되었을 것이다. 감사하다. 그들이 열심히 사는 것에 감사하고, 어김없이 불러주어서 감사하다. 어젯밤 판교의 밤은 참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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