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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이비 글라스 Jun 25. 2020

적당히 하는 것(쉬울 것 같지만 어려운 그것)

일상 속 감상

나는 ‘적당히 하자.’라는 말을 주변이나 대중매체를 통해 흔히 들어왔다. 예전에는 그 말에 대해 별로 깊이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다. 왠지 적당하다는 말이 너무 평범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면서 ‘적당한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적당하다는 것이 뭘까. 너무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중간 지점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10대의 학창 시절을 문득 떠올려 봤다. 나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친구들과 동네를 다니면서 분식집에도 가고, 친구 집이나 우리 집에 같이 놀러도 다니고, 가끔씩 소풍날이나 수학여행에 설레며 좋아했던 평범한 아이였다. 그때는 소소한 것에도 기쁨을 느끼고, 수줍음이 많지만 조그만 일에도 잘 웃었고, 성격도 단순하고 밝은 편이었다. 성적이 특출하게 높은 사람도 아니었고, 외모가 튈 정도로 출중한 것도 아니었고, 예체능에 능력이 탁월하지도 않은, 그야말로 적당한 성적과 적당한 외모, 적당한 특기를 갖추고, 친구들 사이에서 너무 튀지도 않고, 소외되지도 않은 적당한 교우관계 속에서 그 적당함을 적당히 누리며, 그저 적당함이 가져다주는 행복한 삶을 누렸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천하태평하다.’, ‘느긋하다.’, ‘천지에 욕심도 없다.’는 말을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20대가 되면서 대학교에 다니고, 취업을 해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나는 그 적당함이 주는 평화를 잊어버리게 되었던 것 같다. 대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취업을 위해 끊임없이 준비를 하고 경쟁을 해야 하는 존재가 되어갔다. 취업을 해서도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군분투는 계속되었다. 그러면서부터는 ‘적당히 하다.’는 것은 나에게 마치 생존게임을 위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쓸데없는 말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적당히만 하다가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자칫 경쟁에 뒤처지고, 일자리를 잃게 되거나 또는 열정적으로 살고 있는 다른 이들에 비해 나만 매사에 게으른 이미지가 될 것 같은 불안함이 나를 재촉하기 시작했었다. 마치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사람이 다른 참가자들을 의식하며 쉬지도 못하고, 뒤로 밀려날까 봐 뛰는 것을 멈출 수가 없어서 계속 자신을 채찍질하며 달려가야만 하는 상황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 예능프로그램을 보다가 출연자들이 정해진 미션을 수행하는 게임을 하는데 점점 경쟁이 치열해지자 어떤 사람이 ‘적당히 해야지!’라는 말을 했다. 평소 같았으면 별생각 없이 넘어갈 수 있는 말이겠지만 거기에 나온 그 말은 상황에 들어맞아서 공감이 되었다. 모두가 즐기려고 하는 게임에 너무 목숨을 걸다가 승부욕에 가득 차서 결국은 게임에 이기든 지든 아름답지 않은 모양새가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게임은 함께 즐기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서로가 경쟁이 과열되어 기분이 상하게 된다면 차라리 안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들은 게임 자체를 즐겼고, 그 순간에 최선을 다했다. 자신이 그 게임을 잘 못한다고 해서 크게 실망하지도 않았다. 진 팀은 팀원들끼리 ‘졌지만 잘 싸웠다.’ 하면서 서로에게 박수를 쳐주었다. 심지어 상대 팀의 위기에 도움을 주기까지 했다. 그들은 이긴 팀이 진 팀과 함께 벌칙을 받기도 했고, 이긴 팀에게 제공된 상을 진 팀에게 나눠주기까지 했다. 이럴 때의 ‘적당함’이란 ‘서로를 위해 배려하는 마음'과 '과하게 욕심내지 않는 마음’, ‘절제할 줄 아는 마음’ 등을 표현하는 단어 같았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과열되어 치열하게 살아도 늘 잘되기만 하고, 항상 이기기만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마음을 느긋하게 했을 때 더 잘 되는 것들도 있었다. 적당히 하는 것은 부담이 없는 마음으로 하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긴장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할 수가 있다. ‘적당함’ 속에는 긴장하지 않은 편안함이 존재한다.     


몇 해 전 나는 갑자기 체중이 20kg가 불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의 내 마음 상태를 떠올려보면 세상 일이 내 욕심처럼 착착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욕구불만이 생겼고, 그것을 먹는 것으로 욕심을 내어 충족하려고 하는 마음에 지나치게 식탐을 부렸었다. 그런데 시도 때도 없이 먹는 것에 비해 귀찮다는 이유로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었다. 적당하지 않게 먹었고, 적당하지 않게 움직였다. 그랬을 때 그것은 악순환이 되어 나의 건강과 정신을 병들게 했었다. 적당함을 추구하는 절제의 미덕을 지켰다면 살을 빼고, 건강을 되찾기 위한 몇 배의 고통스러운 노력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됐을지 모르겠다.   

당시에 심각해진 건강을 걱정하며 살을 빼겠다고 다짐을 한 첫날 훌라후프를 돌리는데 무리해서 2시간을 했다가 한쪽 발목 인대가 손상되어 한 달간 움직이지도 못하고 물리치료와 한방치료를 받았던 기억도 함께 떠오른다. 그렇다. 뭐든지 적당해야 했다.  

    

예전에 만나던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내가 너무 이기적으로 행동했던 것 같아 미안함에 후회를 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 만난 사람에게는 희생적으로 잘해줘야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박으로 다음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잘해준다고 온갖 노력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성격과 맞지 않아서 마음속에 부작용이 일어났고, 결국 그와 헤어진 후 나는 다시 생각했다. 그냥 태어난 대로 살자고. 이때도 역시 적당했어야 했다.


나는 그 예능프로그램을 본 후로 적당한 것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겼다. 너무 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부족하지도 않은 상태인 것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평온한 마음을 주는 것 같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리스’가 ‘중용의 덕’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중용(중간)을 가장 아름다운 상태로 정의 내린 것에는 분명 우리에게도 큰 의미를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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