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대중문화 산업을 가장 크게 바꿔놓은 것은 바로 코로나바이러스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증가하면서 넷플릭스 등의 OTT 서비스가 전세계인의 일상으로 자리잡았으며, 기업의 재택근무나 아이돌의 영상통화 팬사인회와 같은 ‘비대면성’의 개념 역시 친숙해졌다. 이 영향으로 서서히 떠오르고 있는 트렌드가 있으니, 바로 재패니메이션 (Japan+Animation, 일본의 애니메이션) 문화다
넷플릭스는 애니메이션에 대한 대중적 접근성을 한층 넓혔다. 넷플릭스에서 서비스되는 메가히트작 <귀멸의 칼날>을 비롯해 <체인소 맨>, <스파이 패밀리> 등의 애니메이션은 전체 카테고리에서도 높은 시청 순위를 기록했다. 뒤이어 <스즈메의 문단속>이나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같은 극장 애니메이션은 500만 명에 이르는 관객을 동원하며 대중적 인기를 얻기도 했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케이팝 역시 애니메이션 문화를 포용하기 시작했다. 에스파 카리나, 르세라핌 사쿠라, 투모로우바이투게더 수빈 등 공개적으로 자신이 ‘애니 덕후’ 임을 밝히는 아이돌들도 늘어났다. 인기 애니메이션 <최애의 아이> 챌린지 역시 지난해 케이팝 씬을 뜨겁게 달궜다. 아이브 장원영, NCT 마크를 비롯해 수많은 인기 아이돌이 '최애의 아이' 챌린지를 업로드하며 열풍에 합류한 바 있다.
재패니메이션의 인기는 지금껏 마니아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오타쿠 감성'을 양지화시켜 케이팝의 주재료로 만들었다. 가장 눈에 띄는 성과는 직접적으로 오타쿠 코드를 재현한 걸밴드 QWER일 것이다. 여고생들이 록밴드를 결성하는 내용의 일본 애니메이션 <봇치 더 락!>에서 모티브를 따온 QWER은 일본풍 교복을 입고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떠올리게 하는 J-ROCK 장르의 곡을 노래한다. 지난 4월 발매된 "고민중독"은 아직까지도 멜론차트 최상위권을 지키며, 일본 서브컬쳐 코드에 대중적 소구력이 잠재되어 있음을 당당히 증명 중이다.
올해 최고의 히트곡, (여자)아이들의 "나는 아픈 건 딱 질색이니까" 역시 J-POP의 색채를 따왔다. 음악뿐만 아니라 스쿨 밴드 콘셉트, 롱스커트 교복, 뮤직비디오의 세로쓰기에 이르기까지 아날로그풍 '재패니메이션 감성'을 노련하게 겨냥하고 있다.
하이브 소속 신인 걸그룹 아일릿 역시 90년대 일본 마법소녀물의 무드를 빌려온 데뷔곡 "Magnetic"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풍성한 헤드드레스와 프릴 원피스를 착용한 모카의 무대의상은 애니메이션 코드를 케이팝 스타일링에 자연스럽게 녹여낸 좋은 예시다.
보이그룹도 예외는 아니다. 대세 보이그룹 라이즈는 "Love 119" 뮤직비디오에서 도쿄, 니가타 등 다양한 일본 로케이션을 배경으로 청춘 로맨스/판타지물의 감성을 담아냈다. 특히 밤하늘에서 위성이 떨어지는 장면을 비롯해 여러 장면에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극장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에 대한 직접적인 오마주가 드러나기도 한다.
2024년 최고의 블루칩으로 떠오른 신인 보이그룹 투어스 역시 재패니메이션 코드를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다. 화제의 데뷔곡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는 영상 속 익숙한 일본의 풍경뿐만 아니라 풋풋한 가사나 유머러스하게 데포르메된 각본 등에서 일본 학원물 애니메이션의 테이스트가 진하게 묻어나오는 작품이다.
투어스가 지난 24일 발매한 신곡 "내가 S면 넌 나의 N이 되어줘"는 전작에 비해 일본풍 터치가 더 진하게 묻어난다. 해당 곡의 뮤직비디오가 도쿄, 요코하마, 치바 등 일본 로케이션을 다수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스튜디오와도 협업해 제작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상 공동제작을 맡은 Isai(이사이) 프로덕션은 상술한 라이즈의 "Love 119"를 작업하기도 했고, 이를 총괄한 하시모토 히로토 프로듀서는 이마세, 사쿠라자카46 등 일본 유명 가수들의 뮤직비디오를 다수 제작해온 실력자다. 이렇게 일본 현지의 든든한 조력자들까지 힘을 보탠 덕에 일본식 청춘 스포츠물의 청량한 감성을 케이팝의 문법으로 재치있게 풀어낸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일본 밴드 요아소비가 엠넷 <엠카운트다운>에 출연하고 J-POP 가수 이마세(imase)가 멜론 차트 상위권에 오르고 있는 지금, 일본 문화의 코드들은 더 이상 소수의 '오타쿠'들만 소비하는 비주류 문화로 치부할 수 없게 되었다. 어느새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는 일본 서브컬쳐 문화와 한국 대중의 정서적 교집합을 영리하게 찾아내 트렌드를 흡수하며 또다시 진화하고 있는 케이팝 산업의 변화무쌍한 내일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