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릿-뉴진스 카피 의혹'에 대한 빌리프랩(하이브 레이블)의 대응 분석
‘일시 휴전’인 줄만 알았던 전쟁이 느닷없이 다시 시작됐다. 올 상반기를 뜨겁게 달군 하이브-민희진 분쟁의 이야기다. 민희진에 의해 카피 의혹이 제기된 걸그룹 아일릿의 기획사 빌리프랩은 며칠 전 자사 유튜브 채널에 약 30분 길이의 영상을 업로드하며 현 사태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화제를 모은 민희진의 첫 기자회견 이후 두 달 여의 시간이 흐르며 대중의 성난 여론도 서서히 소강 상태로 접어들고 있던 터라 다소 갑작스러운 타이밍이었다.
잠잠해져 가던 이슈를 다시 꺼내며 억울함을 풀고자 했지만 결과적으로 오히려 다시 기름을 부어버린 모양새다.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영상에는 비판 댓글들이 실시간으로 늘어가고 있다. 이렇듯 상황이 다시금 악화되어 가는 가운데, 지금 필요한 것은 빌리프랩의 대응에서 옳고 그른 점들을 명확히 구별하는 것이다. 현 상황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위해 무엇이 맞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차근차근 되짚어 보자.
1. 무엇이 잘못되었나
빌리프랩의 대응에서 가장 아쉬운 지점은 영상의 논지가 카피 논란에 대한 체계적인 해명보다는 감정적인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가령 멕시코의 걸그룹 진스(Jeans)와 뉴진스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장면은 영상의 본래 목적과는 전혀 무관하다. 또한, 근정전에서 찍은 뉴진스의 댄스 영상이 과거 방탄소년단의 무대를 레퍼런스 삼았다는 주장은 사실도 아니거니와 영상의 흐름 상으로도 불필요한 부분이다. 표절이라는 민감하고 부정적인 논의를 위해 타 아이돌의 이름을 끌고 오는 행위가 바람직하지 않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뉴진스도 누군가를 카피한 것은 마찬가지다’ 라는 감정적 양비론으로는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 뉴진스가 실제로 멕시코 진스를 카피했든 아니든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빌리프랩이 대중에게 제시해야 하는 것은 단 하나, ‘아일릿이 뉴진스를 카피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방법은 간단하다. 제작 과정에 참여했던 디렉터 등의 인터뷰를 통해 원래 아일릿이 의도했던 방향성과 독창성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면 된다. 그러나 실제 영상 내에서 등장한 무수히 많은 내부 관계자들의 인터뷰는 대부분 파편적이고 감정적인 논조로 소모되고 만다.
더 직접적인 방법으로는, 아일릿을 제작할 때 참고했던 실제 레퍼런스나 기획 과정 등이 담긴 문서를 보여주면 된다. 하지만 영상 속에서 빌리프랩이 제시한 기획 자료는 매우 기초적인 프레젠테이션 파일 몇 장이 전부였으며, 그 내용에서도 미흡한 시장 분석이 드러나 대중에게 충분한 신뢰감을 주지 못한다. 예를 들어, 뉴진스가 어른들의 상상 속 소녀이고 아이브가 인형 같다는 분석은 실제와는 정반대다. 뉴진스가 겨냥하는 지점은 ‘현실 속에 존재할 것 같은 소녀’이고, 오히려 ‘상상 속 소녀’는 아일릿의 마법소녀 콘셉트에 가깝다. 또한 아이브 역시 개인의 자의식을 강조하는 나르시시즘 콘셉트를 가진 팀으로, 자아가 없는 인형과는 거리가 멀다. 이렇게 대중의 인식과 괴리된 시각을 보이는 기획서는 신뢰감을 심어주기 어렵다.
이에 더해, ‘아일릿코어’와 같은 과장된 수식어를 덧붙인 것도 불필요했다. 사실 패션, 메이크업 등 아일릿의 스타일링 미학은 개인적 호불호를 떠나 완성도가 꽤 탄탄한 편이다. 떠오르는 패션 트렌드인 걸코어를 중심으로 바비코어, 발레코어 등 페미닌한 무드의 스타일들을 그러모아 자연스럽게 버무렸고, 블러셔를 과감하게 얼굴 전체에 펴바르는 독창적인 메이크업도 패션과 좋은 시너지를 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요소들을 패션계에서 실제로 아일릿코어라는 용어로 지칭하고 있다는 빌리프랩의 주장은 금시초문이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이런 사소한 장면들로 인해 대중은 더욱 신뢰를 잃고, 좋은 기획도 빛이 바랜다.
2. 무엇이 옳은가
빌리프랩이 설명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타 아이돌을 언급하며 논점이 흐려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일릿이 뉴진스의 제작 포뮬러를 카피했다는 민희진의 주장에 근거가 빈약하다는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데뷔 전 명품 브랜드 앰버서더 발탁, 파스텔톤 한복 화보 등 카피당한 ‘포뮬러’의 일부로 제시된 사항들은 뉴진스의 고유한 아이디어로 보기도 어려울 뿐더러, 애초에 포뮬러라고 부를 만큼 유의미한 과정인지도 의문이다. 뉴진스와 아일릿의 포뮬러가 유사한 지점은 저지 클럽(뉴진스), 플럭앤비(아일릿) 등 해외의 마이너한 장르음악을 들여와 케이팝과 블렌딩하는 A&R 전략 정도다.
이어서, 민희진의 행보가 가진 모순을 꼬집는 영상의 최후반부 역시 귀기울일 만하다. 2차 기자회견 중, ‘내가 싸움을 일으킨 게 아니다. 아일릿의 이름을 굳이 끄집어내어 그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잘못’이라는 민희진의 발언은 정작 그 이름을 처음으로 거론한 게 본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듯 보인다. 아일릿뿐만 아니라 르세라핌, 에스파 등 타 아이돌을 직접적으로 거론하고, 폭력적인 욕설을 동원해 이 사태를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진흙탕 싸움으로 끌고 간 인물은 다름아닌 민희진 본인이다. 이제 와서 그 책임을 미디어에 떠넘기고 대응을 회피하려는 모습은 무책임하기 그지없다. 명확한 잘잘못이 가려지기 전까지는 갈등이 완전히 봉합될 수 없다는 빌리프랩 최윤혁 부대표의 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다.
마지막으로, 아일릿에게 가해지고 있는 과도한 비난에 괴로움을 토로하는 김태호 대표의 인터뷰 역시 생각해볼 점을 남긴다. 민희진 사태에 대한 성난 여론이 언제부터인가 아일릿 멤버 개개인에 대한 증오성 사이버불링으로 일부 변질된 것은 사실이다. 아일릿의 멤버 원희는 라이브 방송 중간중간 악플을 클릭해 삭제하는 듯한 모습이 포착되기도 하였으며, 결국 컨디션 난조로 스케줄에 불참했다. 비슷하게, 르세라핌 역시 허무맹랑한 ‘친일 음모론’에 휩싸이기까지 하는 등 도를 넘은 악성 댓글에 시달리다 결국 고소를 선언한 바 있다. 분명 우리는 지금까지의 비난 여론의 수위가 적절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3. 결론
결국, 이 분쟁은 단순한 해명이나 변명으로 해결될 수 없는 복잡한 문제다. 빌리프랩과 민희진, 아일릿과 뉴진스 모두가 이번 사태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감정적 대립과 불필요한 잡음이 이어지고 있는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에 입각한 명확한 증거 제시와 성숙한 대응이다.
어느 한 쪽을 일방적인 악당 혹은 괴물로 만드는 흑백논리는 쉽고 간편한 사고방식이지만, 그것으로 본질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는 없다. 이는 빌리프랩, 민희진, 그리고 대중 모두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다. 빌리프랩은 감정적인 양비론에서 벗어나 아일릿의 독창성과 진정성을 증명해야 하며, 민희진 역시 성숙한 소통으로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고 자신의 행동이 야기한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 대중 역시 특정 개개인에 대한 과도한 비난을 자제하고, 각자의 주장을 냉철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혁신과 성장은 혼란 속에서 피어난다. 이번 사태가 무사히 봉합되어 케이팝 산업에 더 큰 도약과 변화를 가져올 계기가 되어주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