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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빈 Jun 24. 2024

일본 팬들까지 사로잡은 뉴진스, 그 이면의 파격 전략

일본 시장을 공략할 열쇠는 이미 우리 안에 있었다

일본 시장은 케이팝 산업의 오랜 타겟이다. 보아를 시작으로 동방신기, 빅뱅 등 수많은 아이돌이 일본 시장을 공략하는 것을 과업으로 삼았다. 서구권에서 케이팝의 인기가 높아지며 일본 외의 선택지가 많아진 지금도 일본 팬덤은 가장 든든한 캐시카우다. 그 예시로, 엠넷 서바이벌 프로그램 <걸스플래닛999>를 통해 결성된 걸그룹 케플러는 일본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서바이벌 출신 그룹 최초로 연장 계약에 성공한 바 있다. 


따라서 일본은 여전히 놓칠 수 없는 시장이라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일본 시장에 먹히는 케이팝을 만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일본 곡이니 가사는 당연히 일본어로 채우고, 음악 면에서는 알기 쉬운 멜로디가 돋보이는 소녀시대-원더걸스 스타일의 후크송, 콘셉트는 일본답게 '카와이'한 느낌? 


누구나 할 수 있는 상식적인 발상이고 실제로도 수많은 케이팝 걸그룹들이 이러한 노선을 따랐지만, 며칠 전 싱글 "Supernatural"을 발매하며 일본 무대에 데뷔한 뉴진스는 오히려 정반대의 전략을 취한다. 과연 그들은 어떻게 다른가?




일본과 한국의 대중음악 생태계는 비슷해 보여도 많이 다르다. 우선 악곡 측면에서, 케이팝 프로덕션은 4세대 들어 뉴진스를 필두로 비트 중심의 음악을 선보이며 체질개선을 하고 있다. 반면 노기자카46, 사쿠라자카46, AKB48 등 일본을 대표하는 걸그룹들의 음악은 여전히 멜로디를 우선시한 전형적인 버블검 팝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상술한 팀들을 제작한 프로듀서 아키모토 야스시의 성향 때문이다. 아키모토는 걸그룹 아이즈원을 탄생시킨 엠넷 서바이벌 프로그램 <프로듀스48>을 통해 한국과 합작 프로젝트를 진행해 한국에서도 알려진 바 있다. 


일본 걸그룹 시장을 이 아키모토 사단이 십수년간 사실상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멜로디를 중시하는 그의 작법이 산업 전반에서 지배적으로 굳어졌다.때문에 일본 메이저 걸그룹 중 비트 중심의 음악을 하는 팀은 일렉트로니카 프로듀서 나카타 야스타카의 지휘 하에 미래지향적 전자음악을 선보이는 퍼퓸(Perfume)이나 메탈 음악을 선보이는 베이비메탈(BABYMETAL) 정도뿐이다.


따라서 일본 대중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멜로디 중심의 음악이 유리하다는 것이 당연한 발상이다. 실제로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걸그룹인 트와이스나 니쥬 등은 전부 JYP엔터테인먼트 소속인데, JYP는 한국 대형 기획사 중 거의 유일하다시피 멜로디 중심의 음악 기조를 고수해오고 있는 회사다. 


이러한 사정으로 일본에 진출하는 케이팝 팀들은 음악의 방향성을 멜로디 중심으로 설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레드벨벳, 이달의 소녀 등 비트 중심의 음악을 하던 팀들도 일본 발매 곡들은 직관적이고 캐치한 후렴을 강조하는 노래로 콘셉트를 바꿨다.



그러나 뉴진스는 일본에서도 비트 중심의 음악 기조를 똑같이 고수한다. "Supernatural"과 "Right Now"는 드럼의 어택감을 강조하는 편곡에 부드럽고 흐릿한 멜로디를 얹는 전형적인 뉴진스식 작법이 드러나는 곡으로, 늘 그래왔듯 멜로디와 가창보다는 비트가 이끌어가는 트랙들이다. 


장르적으로도 굳이 큰 변화를 주지 않고 "Attention"과 "Super Shy", 두 대표곡을 통해 이미 선보인 뉴잭스윙과 드럼앤베이스를 택했다. 음악 내적으로 일본 로컬라이징을 의도한 부분이라면 일본 가수 마나미(Manami)와 퍼렐 윌리엄스의 2009년작 "Back of My Mind"를 샘플링한 점 정도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일본 발매곡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어 가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Supernatural"의 경우 한국어 가사의 분량이 일본어 가사보다 훨씬 더 많다. 이러한 시도는 가히 이례적인데, 보통 한국에서 먼저 발매된 곡을 추후 일본어로 번안해 발매할 때 한국어 가사를 조금 남기는 경우는 있어도 (빅뱅의 '하루하루' 같은 케이스가 그렇다) 공식적인 일본 활동용 신곡에 한국어 가사를 넣은 경우는 최초다.



뮤직비디오에서도 한국적 속성들이 강조된다. 서울의 마천루 풍경을 배경으로 한 뮤직비디오는 시작부터 남산타워를 보여주고, '안전제일', '꽃', '심박수' 등의 한글 간판을 계속해서 화면 한켠에 등장시킨다. 영상의 전반적인 색감을 과거 버블경제 시절의 1980년대 일본풍으로 로우파이하게 꾸미긴 했지만, 다양한 한국적 미장센을 통해 이곳이 한국의 서울임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고 있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뉴진스는 일본 정서에 동화되는 로컬라이징보다 오히려 K-POP 가수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뚜렷하게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기존의 상식과는 정면으로 배치되지만, 알고 보면 일본 케이팝 소비자들의 정서를 날카롭게 꿰뚫은 전략이다. 



현재 일본의 케이팝 팬층은 한국 문화에 대한 호감과 동경이 크고, 한국어에도 익숙한 젊은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핫하고 인스타그래머블한 장소나 패션에 '한국풍(韓国っぽ)'이라는 해시태그를 붙이기도 하고, '진짜'나 '감사' 같은 한국어 단어를 일본어와 접붙여 신조어처럼 사용하기도 한다. 


이들에게 '한국적인 것'은 낯설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련되고 흥미로운 요소다. 이런 계층을 포섭하기 위해 한국적 요소를 더하면 더했지, 빼야 할 이유가 없다. 한국적 속성을 줄이고 일본적 요소들로 그것을 대체했던 기존의 로컬라이징 방식은 정작 일본 소비층의 진짜 수요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방이다.



하이브 방시혁 의장은 지난해 한 인터뷰에서 'K-POP에서 K를 떼야 산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방탄소년단이 실제로 케이팝의 색깔을 덜어내고 영어로만 가사를 채운 디스코 팝 넘버 "Dynamite"로 빌보드 1위를 거머쥐었음을 고려하면 충분히 일리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한국 문화와 아이돌 산업이 아직 낯설고 팬덤/마케팅 면에서 인프라가 부족한 서구권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이미 케이팝의 파이가 안정적으로 구축되어 있고 한국 문화에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일본 시장은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민희진은 일본 시장을 위해 뉴진스라는 브랜드를 인위적으로 변형하지 않았다. 다만 뉴진스가 지금껏 보여준 뛰어난 음악적 완성도와 탁월한 미적 감각을 토대로 '하던 대로 똑같이 했을 뿐'이다. 이에 더해 일본 팬덤의 성향을 영리하게 파악하고 한국적인 요소를 더욱 부각시켜 차별화를 꾀했다. 


뉴진스의 이 과감한 전략은 일본 시장 공략을 노리는 케이팝 산업에 색다른 방향성을 제시한다. 한국적 정체성을 오히려 포인트로 삼아 그 모습 그대로 일본 대중에게 다가가 보는 건 어떨까. 이 방법론이 반드시 성공을 보장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그동안 누구도 쉬이 시도하지 못했던 창의적이고 신선한 시각임에는 틀림없다. 이제 한국어와 한국 문화, 한국 음악이 가진 잠재력을 재평가하고 새로운 접근법을 수립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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