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개월간이 르세라핌의 커리어 최대 고비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코첼라 무대에서의 라이브 논란부터 앵콜 무대 논란, 홍은채의 언행 논란,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이브-민희진 분쟁까지. 개중에는 뮤직비디오의 장면들을 짜집기한 친일 음모론과 같이 억지스러운 비난도 있었지만, 어쨌든 수많은 논란들 속에 르세라핌이라는 브랜드는 회복이 어려워 보일 정도로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때문에 이번 컴백은 정말 중요했다. 무너져 버린 프랜차이즈에 새 생명력을 불어넣을 리브랜딩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난감하지만 마냥 비관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르세라핌이 이번 컴백에서 딱 세 가지만 충족시킨다면 충분히 반등할 수 있으리라고 예상했다. 첫째, 좋은 퀄리티의 음악. 둘째, 수명이 다한 '독기' 컨셉을 대체할 새로운 테마. 셋째, 그들의 '실력'에 대한 대중의 신뢰 회복.
그러나 지난 8월 30일 발매된 신곡 <CRAZY>는 충분한 해답이 아니었다. 나름대로의 절충안을 내놓았지만 상황을 뒤집기에는 부족한 수였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렸는지 더 자세히 확인해 보자.
2. 양질의 음악, 성공
▲ 르세라핌 뮤직비디오 ⓒ 쏘스뮤직
첫 번째 조건인, 좋은 음악을 가져와야 한다는 명제는 다행히도 완벽히 만족시켰다. <CRAZY>는 분명 올해 발매된 케이팝 곡들 중에서도 손꼽힐 만큼 스타일리쉬한 작품이고, 테크 하우스(Tech House)를 뼈대 삼아 퐁크(Phonk)의 테이스트를 살짝 버무리는 프로덕션의 솜씨가 놀라운 수준이다. 장르 특유의 사운드 텍스처를 세련되게 구현하면서도 케이팝의 유전자를 성공적으로 이식해냈다. 이전까지 선보여온 라틴/힙합과 차별화되는 댄스 뮤직을 본격적으로 차용해 팀의 음악색을 확장하는 영리한 전략이 돋보인다. 더할 나위 없이 신선하고 감각적인, 올해 최고의 케이팝 트랙 중 하나다.
3. 새로운 컨셉, 실패
하지만 '좋은 곡'만으로는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 애초에 하이브 정도의 기획사에서 양질의 곡을 수급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 가지 조건 중 가장 난이도가 낮은 조건인 셈이다. 때문에 더 비중을 두고 투자해야 할 분야는 독기 컨셉을 대체할 새로운 컨셉 구상이었다.
▲ 르세라핌 뮤직비디오 ⓒ 쏘스뮤직
르세라핌의 '독기' 컨셉은 처음부터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피나는 노력으로 자수성가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가사에 비해, 현실 속의 르세라핌은 초대형 기획사의 압도적인 자본력을 바탕으로 처음부터 굉장히 유리한 입지에서 출발한 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라이브 실력 논란까지 터지니 '진짜 노력을 한 건 맞나' 라는 대중의 의심까지 생겨나 컨셉의 개연성 자체가 붕괴되고 만 것이다.
그렇기에 '수정'이 아니라 '교체'가 필요했다. 독기 컨셉이 대중적 수명을 다했다는 건 명백했고 이제 그것을 대체하여 팀을 끌고 나갈 새로운 테마가 요구되었다. 이를 위해 르세라핌이 빌려온 키워드는 바로 '키치'다. 최근의 케이팝에서 자주 등장하는 코드인 만큼 부담 없이 안전하게 시도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 르세라핌 컨셉포토 ⓒ 쏘스뮤직
발상은 나쁘지 않았다. 컨셉 포토 속의 찌릿한 전류 표현, 정전기로 뻗친 머리, 과장된 표정, 쨍한 색감의 의상들로 20세기 미국 B급 공포 영화의 투박한 테이스트를 시각화했다. 한편 '피카츄', '오타쿠' 등의 단어들을 가사에 대놓고 등장시키고, 일본인인 카즈하가 후렴구의 'girl'을 '갸루-'처럼 발음하는 등 하라주쿠식 아니메 코드를 곳곳에 배치하기도 한다.
이처럼 미국과 일본의 B급 서브컬쳐들을 두루 아우르며 키치의 원점을 정조준했지만, 정작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어색하고 뻣뻣하다. 적어도 이 컨셉이 장기적인 플랜이 될 수 없음은 명확해 보인다. 가장 큰 문제는 이렇다할 오리지널리티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기인하는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레드벨벳의 <RBB>를 시작으로 찰리 XCX(Charli XCX), 차펠 론(Chappell Roan), 에스파, 아일릿 등 수많은 국내외 아티스트들이 겹쳐 보이는 탓에 르세라핌만의 캐릭터성을 구축하기엔 그 힘이 약하다. 갑작스런 컨셉 변화를 대중에게 납득시킬 만한 구심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나름대로의 대안은 제시했지만 반쪽짜리 답안이다.
4. 실력 입증, 실패
▲ 르세라핌 뮤직비디오 ⓒ 쏘스뮤직
그래도 나름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컨셉 문제와 달리, 멤버들의 실력을 증명해야 한다는 과제에 대해서는 손을 놓아버린 모양새다. <CRAZY>에는 보컬 실력을 보여줄 구간이 아예 없다. 트랩 힙합 곡이었던 전작 <EASY>보다도 음의 고저차가 적다. 테크 하우스의 장르적 특성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애초에 이 시점에서 굳이 이 정도로 미니멀한 장르를 택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오히려 실력 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어려운 파트 자체를 통째로 없애버려 도망치는 듯한 모양새가 되어 역효과를 일으킬 뿐이다.
▲ 르세라핌 유튜브 ⓒ 쏘스뮤직
대신 실력과 노력에 대한 해명은 음악 외적으로 제시된다. 유튜브를 통해 올라온 다큐멘터리로 멤버들의 피나는 연습 과정을 보여주며 '쉽게 이뤄낸 게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허나 이런 영상은 팬들만 챙겨보는 것이지, 일반 대중이 도합 2시간이 넘는 다큐멘터리를 열심히 시청하고 오해를 풀어줄 리 만무하다. 대중에게 해명해야 할 것을 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목적과 수단이 일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르세라핌은 이 정도로 콕 집어 비난받을 만큼 실력이 부족한 그룹은 아니다. 특히 김채원의 경우 뛰어난 기본기와 곡 해석력을 지닌 최상급 보컬 자원이며, 이번 곡에서도 탄탄한 발성을 토대로 파열음의 청각적 쾌감을 잘 살리는 차진 래핑을 보여 준다. 하지만 대중은 그들의 실제 실력을 친절하게 일일이 찾아서 알아봐 주지 않으니 음악 내에서 증명하는 수밖에 없다. 백 마디 말보다 노래 한 마디면 된다. 2시간짜리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능숙하게 노래를 소화하는 음악방송 한 장면이면 충분하다. 어려운 길이 아니니 굳이 돌아갈 필요가 없다.
5. 'FORGIVEN' 으로 돌아올 르세라핌을 기대하며
옛말에 얻는 것보다 지키는 게 어렵다 했다. 케이팝 산업도 똑같다. 하이브 정도의 공룡 기획사가 신인을 띄우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팀의 한 사이클이 끝나고 리빌딩에 착수할 때부터는 난관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 시점부터는 자본과 마케팅보다 소속사의 경험으로 쌓인 위기 관리 노하우와 순수한 기획력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 에스파 컨셉포토 ⓒ SM ENT.
이런 분야에서 가장 능숙한 것은 SM이다. 오랜 매니지먼트 경험을 통해 매너리즘을 극복하는 노하우를 축적한 SM은 아이돌의 초반 사이클 이후 비즈니스 모델을 다각화하고 성장 로드맵을 확장하는 데 능하다. 가장 가까운 예시로 에스파가 있는데, 광야 세계관에 대한 대중의 피로감이 쌓이며 매너리즘에 빠질 즈음 케이프펑크를 절묘하게 배합한 <Supernova>로 완벽한 커리어 제2막을 열어젖힌 바 있다. 결과적으로 '쇠 맛' 나는 에스파코어의 미학을 정립해 지속성 있는 새 컨셉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현재 르세라핌에게 필요한 건 이런 혁신적인 리브랜딩 전략이다.
▲ 르세라핌 뮤직비디오 ⓒ 쏘스뮤직
르세라핌 사태는 하이브가 향후 케이팝 산업을 건강하게 주도해 나갈 역량이 있는지 검증하기 딱 좋은 시험대다. 비록 <CRAZY>는 현상유지에 가까운 아쉬움을 남겼지만, 멤버들의 스타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여건만 다시 갖춰진다면 얼마든지 재반등할 수 있다. 쏘스뮤직의 현명한 대응을 통해 상황이 수습되고 르세라핌이 'UNFORGIVEN'에서 'FORGIVEN'으로 박수를 받으며 돌아올 수 있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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