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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빈 Oct 05. 2024

나는 생각도 노력도 딱 질색이니까

케이팝 가사 속에 숨겨진 현대 한국인의 절망과 좌절

 현대 사회의 정서를 가장 생생하게 드러내는 매체를 꼽자면 아무래도 매일 대중이 소비하는 음악일 것이다. 특히 대중음악의 가사는 시대의 흐름을 기록하는 일종의 문화적 증언이라 할 수 있다. 대중음악의 가사 속에는 개인적 감정이 담겨 있기도 하지만 집단적 의식과 사회적 기류가 함축적으로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최근 몇 년간 눈부신 상업적 성장을 이룬 케이팝에서도 마찬가지다. 겉보기에는 정제된 이미지와 이상적인 판타지를 전달하는 것처럼 보이는 케이팝이지만 그 속에 현대 한국 사회의 복잡한 정서가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2024년을 뜨겁게 달군 두 히트곡의 가사이다.


1. (여자)아이들, <나는 아픈 건 딱 질색이니까>
그냥 지나치는 게 나을 것 같아 / 나는 생각은 딱 질색이니까


 최근의 한국 사회를 정의하는 키워드를 꼽으라면 ‘학습된 무기력’이 적합할 것이다. 이는 반복된 시도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음을 경험한 사회 구성원들이 점차 문제 해결을 포기하고 무기력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말한다. 더 이상 문제를 직시하거나 저항하려는 노력이 아닌, 그저 흘려보내고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태도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정서다. 이 학습된 무기력은 사회적 문제 해결의 기대치를 스스로 낮추고 그 결과로 생겨난 체념이 일상에 만연하게 된다.


 이러한 정서는 2024년 연간 1위 히트곡의 유력 후보로 꼽히는 (여자)아이들의 <나는 아픈 건 딱 질색이니까>의 가사를 통해 압축적으로 전달되고 있다. “그냥 지나치는 게 나을 것 같아 / 나는 생각은 딱 질색이니까”라는 후렴구는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무기력의 문제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구간이다.  점점 더 빠르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사람들은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를 귀찮게 여기고, 대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지나치며 살아가려 한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사회적 부조리와 불평등을 더욱 고착화하고 집단적 무기력 속에서 문제 해결의 가능성조차 희미하게 만든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저항이 강력했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이끈 촛불 혁명이나,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은 성차별적 구조를 폭로하며 사회적 논의를 촉발했던 미투 운동의 사례는 그 대표적 증거다. 당시에는 정치적 부패, 젠더 불평등, 사회적 불공정에 대한 목소리가 강력하게 표출되었고 이에 대한 폭넓은 사회적 공감대가 적극적으로 형성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미투 운동이 촉발한 성차별적 관행들의 철폐는 제대로 달성되지도 못한 채 무관심의 족쇄를 차고 수면 아래로 침잠해 버렸고, ‘여성가족부 폐지’를 메인 공약으로 내건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젠더 담론에 대한 백래시는 더욱 거세졌다. 일명 ‘채상병 사건’으로 불리는 2024년 해병대 제1사단 일병 사망 사고는 군과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와 은폐 공작으로 인해 사건 관계자에 대한 처벌과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지지부진한 상태다.


 이처럼 개인의 저항을 무력하게 만드는 사건들이 수없이 이어지면서 대중은 더 이상 구조적인 변화가 가능하다는 믿음을 잃고 결국 자포자기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어차피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냥 생각을 멈춰 버리고 ‘그냥 지나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체념의 정서다. (여자)아이들의 노랫말 속에는 개인의 피로감을 넘어 더 이상 변화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 한국인들의 집단적 무력감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나는 아픈 건 딱 질색이니까>가 수록된 앨범의 타이틀곡 <Super Lady>의 흥행 실패는 주목할 만한 의의를 지닌다. 이 곡은 ‘슈퍼맨보다 강한 슈퍼 레이디’라는 메시지를 담아 여성의 연대와 임파워링(empowering)을 주제로 하였으나 대중의 외면을 받았고, 대신 피로와 무기력을 노래하는 수록곡인 <나는 아픈 건 딱 질색이니까>가 대중의 공감대를 형성하며 예상치 못한 히트를 기록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사회 이슈들이 표면적으로는 중요한 주제로 자리잡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무력감에 휩싸여 모두가 복잡한 논의를 기피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징후로 읽힐 수 있다. 병을 완치시켜 줄 치료제에 대한 희망을 접고, 지금 당장의 고통을 없애줄 마취제를 찾게 된 한국인의 심리를 반영하는 슬픈 현실이다.


2. 르세라핌, <EASY>
편하게만 왔다고? / Damn I really make it look easy

 

 현재 한국 사회는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위계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 구조 속에 놓여 있다. 특히, 자본이 자본을 낳는 금융 중심의 경제 체제로 변화하면서 젊은이들은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잃어버렸다. 성실히 일해서 번 노동소득은 부자들이 거대한 시드머니를 투자해 방 안에서 벌어들이는 자본소득에 비할 수 없고, 혼자 힘으로는 평생 일해도 서울에 제 집 하나 구할 수 없는 구조가 고착화되었다.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는 ‘자본’이라는 유일한 기준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는 젊은 세대가 느끼는 무기력감과 절망감을 더욱 심화시켰다.


 때문에 과거에는 성실한 노력과 자수성가의 이야기가 찬사를 받았지만,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인 사람들을 동경한다. 뼈빠지게 노력해서 거머쥐는 성공 대신 차라리 타고난 집안 배경으로 손쉽게 이뤄낸 듯한 성공이 더욱 현실적이고 매력적으로 비춰진다는 것이 오늘날 청년층의 지배적 정서다. 이는 한국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양극화가 심화됨에 따라 젊은 세대가 느끼는 체념과 무기력의 뿌리를 보여준다.


 이러한 경향은 대중문화 전반에도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어, 웹툰과 웹소설에서는 ‘노력 없이 하루아침에 최강의 힘을 얻는’ 이야기가 대세를 이루며, 드라마에서도 주인공의 고난을 해결해주는 재벌 2세와 같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 캐릭터가 등장하여 상황을 단번에 해결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비슷한 현상을 최근 케이팝 산업의 전략 변화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방탄소년단이 허름한 숙소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꿈을 위해 노력하던 그들의 과거를 가사에 담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뉴진스와 같은 최신 아이돌 그룹은 데뷔하자마자 명품 브랜드의 앰버서더로 활동하며 ‘태어날 때부터 고생이라곤 안 해본 금수저’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주력한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거쳐야 했던 수많은 노력과 난관들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화려하고 럭셔리한 이미지들을 병렬적으로 전시하면서 아이돌의 직업적 성공담을 평면화하는 것이다. 아이돌의 본뜻이 ‘우상’임을 감안하면, 청소년층의 우상이 자수성가 신화가 아니라 금수저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분히 징후적이다.


 이러한 세태와는 반대로, ‘편하게만 왔다고? / Damn I really make it look easy’ 로 대표되는 르세라핌의 <EASY> 가사는 표면적으로는 자신들이 쉽게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이면에 피나는 노력이 있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노력의 가치를 대변하고자 하는 그들의 메세지는 이윽고 설득력을 잃고 마는데, 이는 르세라핌 자신 역시 하이브라는 거대 자본을 등에 업고 막대한 구조적 특혜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노력을 통한 희망의 서사가 도리어 특권의 프리즘을 통해 왜곡되며 그 의미가 퇴색되는 것이다.


 결국, <EASY>는 아이러니하게도 ‘노력’의 가치를 외치면서 그 노력의 가치가 다시 한번 부정되는 역설을 드러낸다. 서민의 자수성가 신화조차도 거대 자본에 의해 탈취당해, 개인의 힘으로 뒤집을 수 없는 사회 구조에 대한 패배의식을 대중의 무의식 속에서 재생산하는 문화적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극적인 결말은 한국 대중이 더 이상 노력에 기대를 걸지 않고 끝없는 허탈감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오늘날의 케이팝은 한국 사회의 계층 이동 불가능성과 뿌리 깊은 무력감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거울이자 그 안에 깃든 좌절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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